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이후인 1919년 11월10일. 만주의 한 시골 마을에 신흥무관학교 출신 젊은이 13명이 모였다. 이들은 대한의 독립을 위해 항일 무장 투쟁을 벌이기로 뜻을 모아 조선의열단을 결성했다. 뉴시스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에 비견되는 의열단의 창단 100주년을 맞아 '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도움으로 의열단의 대표적 인물들을 매주 소개한다. 독립운동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음에도 잊혀져만 가는 선인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재조명해 본다.
일제 경찰이 혼비백산하는 사이 두 번째 폭탄이 마룻바닥에 떨어졌으나 이 역시 폭발 위력이 약해서 죽거나 다친 사람은 없었다.
폭탄을 던진 청년은 급히 몸을 피했으나 일제 경찰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숨어있던 민가 부엌에서 식도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청년은 응급처치를 받고 회복했지만, 끝까지 당당하게 일제 경찰에 맞서다 27세 일기로 숨을 거뒀다.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최수봉 의사(1894~1921) 이야기다. 최 의사는 김원봉 의열단장과 동향이며 박재혁 의사와 함께 조선의열단을 대표하는 열혈 단원이었다.
1894년 3월3일 밀양군 상남면에서 태어난 최 의사는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기상이 뛰어나다는 소리를 들었다. 마을 서당에서 한문과 신지식을 배우고 밀양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밀양공보를 같이 다녔던 김원봉이 훗날 '약산(若山)과 의열단(義烈團)'에서 최 의사의 일화를 소개하는데, 이는 최 의사의 성품을 곧잘 보여준다.
일본인 교사가 조선사를 가르치던 중에 민족 시조인 '단군'에 대해 자기네 대화족(大和族)의 시조로 추앙되는 스사노 오노미코토(素盞鳴尊)의 '아우'라고 말했다.
그러나 두 인물의 생존연대만 보더라도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었고, 최 의사는 학기말의 구두시험 때 "소잔명존(素盞鳴尊·스사노 오노미코토)은 우리 단군의 중현손(重玄孫·9대손에 해당)이오"라고 서슴없이 답해 퇴학당했다.
이후 1910년 사립 동화학교(同和學校)에 편입학해서 전홍표(全鴻杓) 교장 밑에서 2년간 수학하며 나라사랑 정신과 역사 교육을 받았다. 1912년에는 부산 범어사(梵魚寺)에서 운영하는 명정학교(明正學校)에 들어갔다.
1913년 명정학교를 자퇴하고 평양으로 가서 미국 북장로교 계통의 중학교인 숭실학교에 입학했다. 숭실학교에서는 4년 과정 중 3년만 다니고 중퇴했다. 일본의 식민지 교육에 흥미를 잃었기 때문이다.
1916년 음력 5월께 평북 창성군으로 가서 프랑스인 경영의 사금광(砂金鑛)에서 1년간 광부생활을 하고, 정주에서는 집배원으로 일하며 독립운동의 기회를 엿봤다.
1919년 최 의사는 다시 고향 밀양으로 돌아와 3·1만세시위에 참가했다. 같은 해 독립운동가 고인덕은 중국 상하이에서 구입한 폭약 및 폭탄제조기를 밀반입해 귀향한 후 그것을 사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1920년 의열단은 제1차 국내 일제 통치기관 총공격거사 계획을 세우고 추진해 4월부터 폭탄 밀반입과 실행준비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정보가 경기도경찰부에 탐지돼 수사가 개시됐고 밀입국한 단원 다수와 국내 조력자들이 6월 중순 이후로 연이어 붙잡혔다. 밀양 내일동의 김병환 집에 숨겨둔 폭탄 3개도 압수됐다.
7월29일 총독부 경무국이 사건을 공개하고 피검자 16명 명단 및 신원사항과 함께 수사결과를 발표하자, 동아·조선·매일 3개 신문이 '밀양폭탄사건'이라는 이름으로 호외를 내고 대서특필했다.
그 후 9월 창원군 진영(進永)을 통해 밀반입해 은닉해 둔 폭탄 13개도 적발·압수되고 배중세 등 여러 단원이 추가로 피검됐다.
최 의사는 1920년 11월 상남면 기산리 묘지에서 김상윤과 만나게 됐고 그로부터 독립운동에 진력할 것을 권유받아 쾌히 승낙했다. 얼마 후에는 기산리 묘지에서 의열단원 이종암도 같이 만나 독립운동의 기세를 진작시키기 위해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할 것을 상의했다.
그 후 밀양읍내에서 이종암과 재차 회합해 12월27일에 결행키로 협의하고, 마침내 26일 저녁에 삼문리 장봉석 소유의 무인 농막에서(밀양역 앞 다리 건너 솔밭에서) 이종암을 만나 2개의 투척용 충격즉발식 폭탄을 건네받아 다음날 결행했다.
1920년 12월27일 오전 9시40분께 밀양경찰서에서는 서장 와타나베가 서원 19명 전원을 집무실에 불러 훈시하고 있었다. 최 의사는 창문 너머로 폭탄을 투척했고 순사부장 쿠스노키의 오른팔에 맞고 떨어졌지만 불발됐다.
일제 경찰이 혼비백산한 틈을 타 다시 두 번째 폭탄을 던졌지만 내부 식기 등만 일부 깨지고 불발이 되자 최 의사는 몸을 피했다. 이후 일제 경찰의 포위망 좁혀져 오자 숨었던 민가의 부엌에서 식도를 찾아 자신의 목을 찔러 자결을 택했다. 그러나 순사들이 급히 최 의사를 읍내 일본인 병원으로 옮겼고, 응급처치 후 2주간의 가료 끝에 회생했다.
법정에서 최 의사는 왜적의 경찰서를 폭파하지도 못하고, 자결도 실패한 채 왜적에게 모욕을 당하고 있는 게 분하다면서 자신의 행동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한 거사였음을 거리낌없이 말했다. 그는 의열단원으로서 기개를 꺾지 않았다.
최 의사는 1심에서 무기징역, 검사 공소에 의한 2심에서 사형이 선고되고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으로 사형이 확정됐으나, 극형의 선고에도 흔들림 없는 자세로 일관했다.
확정판결 한 달 보름만인 7월8일 대구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교수대에 선 최수봉 의사는 안색 하나 변함이 없이 당당하게 형을 받고 숨을 거둬 의열단원의 장렬한 모습을 보였다.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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