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책]화가의 일상·세계사를 품은 스페인 요리의 역사·문화유산의 두 얼굴

기사등록 2019/08/25 06:05:00

【서울=뉴시스】 이수지 기자 = ◇화가의 일상 

사회경제사적 미술사 연구의 시각 및 방법론이 집대성된 중국 회화 연구서다. 전통시대 중국 문인화가들의 생계와 작업을 사회경제사적으로 조명했다. 중국 화가들이 처한 사회경제적 조건이 그들의 양식과 주제를 정한다고 주장한다.
 
문인들의 선물용 그림은 증정 형식을 빌린 상업적 그림이라고 본다. 선물로 받은 그림은 바로 시장에 내다팔아 현금화할 수 있었다. 현금을 꺼렸던 문인화가들은 물품을 그림값으로 받았다. 주문자들로부터 서비스, 호의를 받기도 했다. 그림 주문에는 주로 하인을 통한 편지가 활용됐다. 화가와 친분 있는 사람들이 중개인으로 활용됐다. 이들은 수고비를 받으며 그림 매매를 중개했다. 화가에게 들어온 주문을 처리하고 작품 판매를 홍보해 주는 대리인도 있었다. 대리인 중에 화가도 있었다. 화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시장에서 공개적으로 팔았다. 빈궁한 화가는 그림 주문자들의 집에 기거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우거화가(寓居畵家)로 활동하기도 했다. 명나라 후기 상업 융성으로 신흥부자층이 형성되면서 그림 수요가 폭증해 액막이 그림에서부터 생일, 결혼, 퇴직을 기념한 축하용 그림까지 수많은 종류의 그림이 제작, 소비됐다. 이 추세 속에서 문인화 상업화는 크게 진전됐고 문인화가들은 그림을 통한 이윤 추구가 직업화가와 차이가 없게 됐다.그림 수요 급증에 화가들은 제자, 친구를 조수로 활용했다. 대필화가 고용도 그림 제작을 늘렸다. 당시 대필화가의 그림이 팔린 이유는 구매자에게 작품 진위보다 대가 필치와 화풍이 작품에 반영되는 것, 즉 '화가의 손'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제임스 케힐 지음, 장진성 옮김, 350쪽, 2만원, 사회평론아카데미 



◇세계사를 품은 스페인 요리의 역사   

스페인 자연과 역사가 담긴 스페인 요리 세계를 탐색했다. 끓이는 조리법으로 만드는 요리 오야, 까수엘라 같은 음식에는 스페인 역사가 담겼다. 깊고 큰 냄비를 뜻하는 오야는 냄비에 조리한 국물 음식를 가리키게 됐다. 지역에 따라서 '꼬시도'라 불린다. 오야는 이런저런 재료를 넣어 끓이는 요리로, 무엇을 넣고 끓이느냐에 따라 왕실 음식으로도, 서민 음식으로도 각광받았다. 현대 오야는 지역과 가정에 따라 다양한 식자재를 활용하지만, 기본은 병아리콩과 감자 같은 채소, 또시노 같은 돼지고기 가공품이다. 또시노는 스페인 역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식자재다. 스페인에서 돼지고기가 중요한 육류가 된 것은 가톨릭 부부 왕, 이사벨과 페르난도가 벌인 국토회복운동의 결과다. 이슬람교도뿐 아니라 유대교도까지 배척받게 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스페인에 남아야 했던 이들이 돼지고기를 먹음으로써 가톨릭에 대한 복종을 증명해야 했다.

유약을 바르지 않고 구운 뚝배기 까수엘라는, 조리한 음식도 그 이름으로도 불린다. 끓이기보다는 조리는 것으로, 식재료와 소스를 동시에 만든다는 스페인적인 특징이 있다. 살이 오른 정어리를 택해 씻은 후 후추와 생강, 사프란을 잘게 부순 것, 파슬리를 잘게 썬 것, 허브, 잣, 아몬드, 건포도를 정어리와 잘 섞어서 기름과 까수엘라에 넣고 오븐이나 숯불로 조리한다. 까수엘라에 토마토소스를 넣고, 씻은 정어리와 붉은 피망, 양파, 마늘, 파슬리를 잘게 썰어서 소금, 후추, 사프란으로 조미한 것을 반씩 교대로 쌓고 오일을 끼얹어서 약한 불에서 조리한다. 전자는 16세기 요리사 루뻬르또 데 놀라의 요리법이고, 후자는 현대 요리사 안나 마리아 까레라의 요리법이다. 정확히 누구의 언제 요리법인지 몰라도 두 음식 사이에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이 가로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후자의 주재료인 토마토소스, 피망 때문이다. 물론 조금 더 스페인의 역사에 정통한 사람이라면 전자의 레시피에서 잣, 아몬드, 건포도 같은 프루따 세까(견과류와 말린 과일의 통칭)를 쓰는 것이 스페인을 지배했던 이슬람의 영향임을 알수 있다. 와타나베 마리 지음, 권윤경 옮김, 260쪽, 1만6000원, 따비



◇문화유산의 두 얼굴

문화유산을 통해 조선 권력자들이 예와 도의 패권 전략을 어떻게 구사하고 펼쳤는지 살펴본다. 조선시대 왕릉과 궁궐, 읍치와 성곽, 성균관과 향교, 서원 등의 건축물에 관해 권력기술자들이 권력 유지와 통치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관점으로 이야기한다. 유럽, 일본 등 다른 나라 사례와 함께 건축물을 짓고 유지한 인부이자 그 재원을 생산하는 인력이었던 백성에게도 주목했다.  

한반도에는 왕릉이 고대 이후 지속적으로  조성됐다. 조선시대에 조영된 왕과 왕비의 능만 11기에 이른다. 왕릉은 죽은 권력자의 안식을 위한 의례 공간이기보다 되레 산 자들의 의지와 열정, 음모와 조작, 땀과 눈물이 배인 치열한 삶의 장소라 본다. 백성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왕과 왕족의 생활공간이자 관료들의 정치공간인 궁궐은 그야말로 권력의 중심이었다. 왕은 신권 견제를 위해 궁궐 중건을 추진하기도 했고, 궁궐 의례를 통해 왕권의 정통성과 지배 이데올로기를 각인시키려 했다. 그 과정에서 왕과 신하의 대립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 고래 싸움에 터져나가는 새우등은 백성이었다. 궁궐은 그 규모와 상징성으로 인해 건립과 보수에 대규모 자본과 노동력이 요구됐다. 이를 충당하기 위해 조세 와 부역은 불가피했다. 농번기를 제외하고 밤낮없이 차출됐고 그 과정에서 백성들이 말 그대로 죽어나가는 것은 일상다반사였다. 궁궐에서 행하는 국가의례나 궁궐에서의 삶이 가능하도록 갖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궁녀 1000여 명이나 환관 수백 명도 백성이었다. 장엄하게 지어지고 엄정하게 꾸려진 궁궐은 지배자의 권위를 드높이고 왕조 번영을 꿈꾸게 하는 상징이었지만, 그 그늘에는 항상 민초의 땀과 한숨, 눈물과 피가 어렸다. 조윤민 지음, 372쪽, 1만6000원,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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