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낮 12시 45분, 그곳에 빛이 있었다.
"몸과 긴장을 풀어주고, 휴식할수 있는 '쉼 명상'을 시작합니다.
등을 대고 누운 상태로 두 다리는 어깨너비로 넓게 벌려주시고, 몸을 최대한 편안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제 두 눈을 감고 깊은 호흡을 시작합니다. 코를 숨을 길~게 들이마시고, 코 또는 입으로 숨을 내쉽니다....이 시간은 나와 온전히 있어주는 시간입니다. 나의 몸과 마음이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휴식하고...지금서 부터 안내해 드리는 몸 부위마다 숨을 마시면서 최대한 힘을 주고 수축시켰다가 내쉴땐 완전히 힘을 풀고 이완하며 몸에 쌓인 긴장감을 풀어내겠습니다. 자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긴장을 풀어서일까. 두 눈을 서서히 뜨자 보이는 공간은 신비로움 그 자체다. 둥근 천장을 가로지른 채광이 그대로 들어와 두줄기 광선검처럼 둘러쳐졌다. 아무것도 없는 회색 콘크리트 공간인데 안온함과 고요함에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해발 275m 산자락, 돌무덤 같아 보여 꺼림칙했던 느낌이 순식간에 변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강원도 원주 산꼭대기 미술관' 뮤지엄SAN(관장 오광수)이 다시한번 '기분 좋은 만남'을 선사하고 있다. 2013년 개관, 그 자체만으로 '힐링'이 되는 미술관은 개관 5주년 기념으로 '명상관'을 오픈했다. 명상관에 어울리는 명상 오디오가이드를 제작해 30분 간격으로 상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뮤지엄 산을 지은 일본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새롭게 설계했다. “태양의 움직임과 함께하는 공간에서 명상을 하는 이들의 정신은 자연과 우주를 만나 교감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설계 스토리를 전한 안도의 말처럼 명상관은 '빛의 풍경'이 환상적이다. 일본 오사카에 있는 안도의 대표작 '빛의 교회'(1989)를 연상시킨다. 40평 면적의 돔 공간으로, 노출콘크리트로 되어 있는 내부로 들어서면 천정 중앙을 가르는 아치형의 천창을 통해 시시각각 달라지는 빛 그림자가 고요함과 투명함을 더한다.
이미 건축가들과 명상인들에게 입소문이 났다. 지난 1월 개관했는데 2000명 넘게 방문했다. '명상관'은 오광수 관장 철학에서 나왔다. "프랑스 어느 예배당에서 명상관을 갔는데 여행을 하면서 하는 명상이 너무 좋았다"는 한 마디 말이 씨앗이 됐다. 뮤지엄 곳곳에 명상적인 공간을 남겨놓은 안도는 이 이야기를 듣고 반색했고 흔쾌히 설계를 맡았다. "미술관은 더 이상 미술 전시만 하는게 아니다. 사회적 역할, 복합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지가 담겼다.
뮤지엄 산은 '소통을 위한 단절'이 슬로건이다. 자연의 품에서 건축과 예술이 하모니를 이룬 공간은 마치 무릉도원 같다. 꽃과 나무, 조각품이 돌과 물위에 반사하며 계절별로 매력을 뽐낸다. 드론으로 촬영한 영상을 보면 깊은 산속에 감춰져 있는 모양새다. 지난 2013년 원주 오크밸리 골프장 안에 개관한 뮤지엄 산은 산자락 꼭대기에 있다. 전체길이 700m, 대지면적 7만1172㎡ 규모다. 개관 당시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빛과 공간의 마술사'로 꼽히는 미국 설치예술가 제임스 터렐관도 오픈해 화제를 모았다.
그림 전시만이 아닌 뮤지엄 산처럼 휴식과 자유를 선사하는 미술관 운영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개 재벌그룹이 만드는 미술관은 힘이 있지만, 기업의 흥망성쇠에 따라 운명을 달리한다. 삼성리움미술관이 예로 2017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된 이후 기획전을 취소해 현재까지 잠정 보류상태다.
뮤지엄 산이 명상관까지 오픈하며 관람객에게 진정한 힐링을 제공하는 배경이 있다.
지난 1월 타계한 한솔그룹 창업주 고(故) 이인희 고문의 남다른 문화사랑 덕분이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 장녀다. 국내 미술시장에서 '국내 1호 아트 컬렉터'라 불릴 정도로 문화 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이 고문이 1995년 문화 예술계 후원을 위해 사재 40여억원을 출연해 한솔문화재단을 세웠다. 뮤지엄 '산'은 이인희 고문의 필생의 역작으로, 생전 휠체어를 타고 자주 방문, 관람객들을 보며 행복한 모습을 지었다는 후문이다.
개관했을때는 또 하나의 '재벌 미술관'이라는 시선도 있었다. 이인희 고문이 40년간 수집한 컬렉션때문에 미술관이 지어졌다는 분위기였다. 실제로 미술관은한솔그룹이 8년에 걸쳐 지어 이인희 고문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개관했다. 이 고문의 컬렉션을 중심으로 매년 상반기 하반기 기획전과 상설전을 펼치고 있다.
한솔그룹이 운영하는 미술관이라는 이미지를 탈피한 건 개관후 이듬해다. 2013년 한솔뮤지엄으로 문을 열었다가 2014년 현재의 이름인 뮤지엄 산(SAN)으로 변경했다. 공간과 예술, 자연이 융화되는 미술관을 지향한다는 뜻으로 스페이스(Space)-슬로우(Slow), 아트(Art), 네이처(Nature)의 앞글자를 땄다.
한솔그룹과는 별개로 독립 미술관으로 나아가겠다는 변화다. 이 고문은 사후 120억원대 주식을 한솔문화재단에 기증했다. 재단이 문화 예술 발전을 위해 사업을 지속할 수 있는 안정적 토대를 만들겠다는 평소 고인의 뜻이 반영됐다. 실제로 한솔그룹이 골프장 '한솔오크밸리'를 매물로 내놓았지만 오크밸리 안에 위치한 뮤지엄 산은 매각 대상에서 제외됐다.
뮤지엄 산 측은 "이인희 고문의 뜻을 이어가는 한편 자립 미술관으로 발돋움하겠다"는 계획이다.
산속에 있는 미술관답게 툭 터진 자연속에서 휴식과 자유가 절로 누려진다. 물위에 떠 있는 것 같은 카페 테라스는 연초록 잎들이 새록새록 올라오는 나무들과 함께 소란스럽다. 삼삼오오 앉은 여인들의 '아~ 행복하다'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린다.
미술관인데, '한국관광 100선'에 4년째 선정됐다. 완연한 봄인 4~5월이면 상춘객이 늘어 주말에는 1000여명는 넘는 관람객이 북적인다. 연간 17만명, 지금까지 누적 관람객이 140여만명에 이를 정도로 자연 속에서 휴식할 수 있는 미술관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봄 기획전 '기하학 단순함 너머전'과 이인희 고문의 소장품전인 한국미술의 산책:추상화전도 열리고 있다. 개관 6년차, 뮤지엄 산의 명물도 변하고 있다. '제임스 터렐관'보다 '명상관'으로 발길이 이어진다.
"잠시 살펴봅니다. 처음 명상을 시작했을때보다 호흡이 조금 더 편안해졌는지, 마음이 조금 더 개운해졌는지, 잠시라도 숨을 돌리고 쉬어갈수 있는 명상의 시간을 마련한 자신 스스로에게 고마움을 표현해 줍니다. 또 오늘도 역시 열심히 살아준 나의 몸을 향해 수고했다, 고맙다고 말해 줍니다. 그리고 나의 몸과 마음을 향해 진심으로 말해 줍니다. 나의 몸과 마음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나의 몸과 마음이 힘들지 않고 편안하기를 바랍니다. 자 이제 깊은 숨을 완전히 마시고 길게 내쉬고 천천히 준비되면 두 눈을 서서히 떠줍니다."
'불나는 세상', 복잡 복잡 혼란스런 도시의 번잡에서 2시간만 벗어나면 된다. '다른 곳에는 없는 꿈 같은 뮤지엄(dreamlike museum like no other)'. 그 곳에 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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