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정략적 악용과 편가르기로 그릇된 역사 반복"
"역사·사법 단죄, 교육·공동체의식·피해자 치유 중요"
"국가폭력 역사 공감, 이야기 담은 콘텐츠 개발해야"
"5월 항쟁 연극이 운명 바꿔", 5·18 전국·세계화 주력
광주서 20년만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 자리 옮겨
【광주=뉴시스】 신대희 기자 = "5·18 민주화운동 왜곡이 반복되는 것은 국민을 학살한 가해자들의 철저한 자기반성이 없었기 때문이죠. 역사·사법적 단죄와 국가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치유가 중요합니다."
김찬호(48) 광주트라우마센터 연구기획팀장은 3일 "끊임없는 5·18 역사 왜곡은 실체적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가해세력과 일부 극우세력 등이 5·18을 정략적으로 악용하고 철저한 자기 반성 또한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이 같이 말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김 팀장에겐 광주가 제2의 고향이다. 그는 "고등학생 때 본 연극 한 편이 운명을 바꿨다"고 했다.
종로의 한 소극장에서 민중항쟁의 역사를 담은 연극 '금희의 5월(극단 토박이)'을 보고 깊은 울림을 받았다.
광주의 역사에 관심을 가진 그는 매일 도서관에서 5·18 관련 서적을 읽었다. 고1 방학 때인 1988년 8월 광주 망월동 5·18 옛 묘역을 참배하며 민주 열사들의 헌신을 깨달았다.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부채 의식을 갖고 광주에서 대학을 다니던 그는 졸업 직전 운명 같은 기회를 맞았다.
5·18 기념재단에서 국제사업을 담당할 공채 1기 직원을 모집했던 것. 소명 의식과 유학 경험을 살려 1999년 10월 재단에 입사한 그는 2002년부터 5·18을 본격적으로 국제사회에 알렸다.
인적 네트워크가 중요하다고 판단한 김 팀장은 아시아 각국에 5·18의 소중한 역사를 공유하는 데 주력했다.
각자 삶에서 올바른 역사 인식을 공유하고 세대 간 경험이 축적돼야 인권과 민주주의를 지키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가 2004년 기획한 광주국제평화캠프는 광주아시아포럼으로 발전, 아시아의 인권·민주주의·평화 등을 모색하는 국제사업으로 자리 잡았다.
김 팀장은 5·18 아카데미, 아시아 민주화운동 재조명, 세계 시민사회와의 연대 사업, 청년 국제 인턴, 5·18 교육 활동가 양성 등 5·18의 가치를 확장·계승하는 네트워크와 각종 정책도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아시아 각국 인권 활동가들은 자국의 비민주적 제도를 바꾸는 데 주력하고 있다.
'광주인권상'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심사위원 추천기관을 국회의장, 국가인권위원장 등으로 못 박는 규정도 마련했다.
2013년까지 이 같은 활동을 펼치고 재단 사무처장직을 내려놓은 그는 2015년 트라우마센터 연구기획팀장으로 자리를 옮겨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고통을 치유하는 데 힘써왔다.
35개국에 사는 250여 명과 매일 소통하며 '5·18 세계화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그는 최근 촉발된 5·18 망언 파문에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김 팀장은 나치 범죄 부인 행위를 처벌하고 끝없는 속죄를 하고 있는 유럽 국가들의 사례를 들며 "국가폭력은 여러 사회구조적 문제와 역사 흐름이 결부돼 있지만, 가해자들이 왜곡된 인식을 토대로 무분별하게 공권력을 행사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이어 "5·18 가해자들은 39년간 만행을 은폐했고, 진실한 사과도 하지 않았다. 국가 또한 역사의 상처를 보듬어야 할 책임을 소홀히 했다. 쌍용차·용산참사, 백남기 농민 사건, 박근혜 정부 계엄령 실행계획 등을 보면, 다양한 방식으로 제2의 5·18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5·18의 당사자였던 군 당국을 비롯, 사법·수사·공공기관 종사자들에 대한 역사 교육이 필요하고 국가폭력과 인권 유린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던 이들을 공소시효 없이 끝까지 추적·처벌해야 공권력의 오남용이 사라진다. 은폐된 진실도 반드시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팀장은 "출세지향만을 강요하고, 불의와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지속된다면 그릇된 역사가 반복될 것"이라며 '공감'과 '치유'의 중요성도 역설했다.
역사 폄훼로 지위·권력을 유지하는 일부 정치권의 다양한 사례를 들며 "편가르기의 정치 구도를 타파하지 못하면, 편협한 역사 인식만 확대·재생산된다. 일상 속 공동체 의식을 갖추고, 민주주의와 역사를 올바르게 아는 것이 왜 중요한지 끊임없는 교육과 공감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또 "5·18 피해자들은 항쟁을 '승리의 투쟁'으로 기억하기 보단, '폭력에 대한 아픔'이란 증후군을 갖고 있다. 이들의 아픔이 치유되지 못하면, 수동적인 삶을 살게 되고 결국 사회 성장에도 악영향을 끼친다"며 "국가는 그들의 처절한 아픔과 망가진 삶을 치유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국민이 5·18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스토리텔링도 강조했다.
김 팀장은 "민주화와 진상 규명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이들을 기억하기 위한 창작물과 역사 콘텐츠가 부족하다. 단순한 기념비나 사적지를 만드는 게 아닌 그들의 삶을 다양한 콘텐츠로 만들어 감동을 줘야 한다. 5·18이 무겁게 느껴져선 안 된다. 기념물·콘텐츠가 크건 작건 이야기를 지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5·18 전국·세계화는 역사적 가치를 어떻게 전파하고 후손들이 어떤 정체성을 지니는지가 핵심"이라며 "'불의한 권력이 1980년 희생한 우리를 폭도라고 누명을 씌웠지만, 광주는 언제든 정의를 위해 투쟁할 준비가 돼 있다'는 당당한 패러다임도 가져야 한다. 슬픈 역사가 아닌 공동체와 민주를 위한 투쟁의 역사를 표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제주 4·3, 부마항쟁, 대구 2·28 등 다른 지역의 국가폭력 역사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광주가 먼저 포용하고 열린 자세로 공감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5·18 대동정신 확산'에 20년을 바친 김 팀장은 이달 11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국제 업무 담당자로 자리를 옮긴다.
광주를 떠나는 그는 "많은 가르침을 준 광주에서 책무를 다하지 못해 죄송하다. 그동안 어려운 시간 함께 힘이 되준 아내에게 미안함과 감사를 드리고, 지금까지 응원해 주시고 격려해 주신 많은 선후배, 동료들께 감사드린다"며 "광주와 5·18,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더욱 노력하겠다"고 했다.
역사의 상처를 보듬고 민주·인권 국가로 가는 표본을 공유했던 그의 운명은 39년 전 광주가 꿈꿨던 '대동세상 실천'으로 이어진다.
sdhdream@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