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박서영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기사등록 2019/02/10 17:34:32
【서울=뉴시스】 신효령 기자 = '당신을 만난 후부터 길은 휘어져/ 오른쪽으로 가도 왼쪽으로 가도 당신을 만나요// 길 안에는 소용돌이가 있고 소실점도 있지만/ 뒤섞여버린 인생과 죽음과/ 사랑과 체념이 있지만// 서로에게 닿을 듯이 멀어지는 타인들의 거리에서// 당신이 사라져버린 후에 나는 전율하는 모든 순간들에게/ 묵념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어요'('타인의 일기' 중)

199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박서영(1968~2018)의 유고시집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가 출간됐다. 사랑과 이별에 관한 시 51편이 담겼다.

'점점 생각이 많아지고 있어/ 아름다움이란 먼 곳에서 되돌아온 헛것이라는 생각// 달이 뜨고 당신과 나의 경계처럼/ 두 뺨에 물 흔적선이 선명해질 때/ 시든 풀잎 같고 국경 같은 입술이 불타는 걸 봤어/ 붉게, 젖어서, 젖은 것들도 불탄다는 걸/ 처음 알았지만 잡히지 않은 불길이 있다는 걸/ 재가 되어야 끝나는 이야기가 있다는 걸 알았어/ 아, 물론 이제부터 재의 이야기가 시작되겠지만'('숨겨진 방' 중)

'실종은 왜 죽음으로 처리되지 않나/ 영원히 기다리게 하나/ 연락두절은 왜 우리를/ 노을이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항구에 앉아 있게 하나/ 달이 뜰 때부터 질 때까지 앉아 있게 하나/ 바다에 떨어진 빗방울이 뚜렷한 글씨를 쓸 때까지/물속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게 하나/ 기다리는 사람은 왜 반성하는 자세로/ 사타구니에 두 손을 구겨넣고는 고갤 숙이고 있나// 꽃나무 한 그루도 수습되지 않는/ 이런 봄밤에/ 저, 저 떠내려가는 심장과 검은 성게가/ 서로를 껴안고 어쩔 줄 모르는 밤에'('성게' 중)

박 시인은 2017년 10월18일 출판사 문학동네로 최종 원고를 보냈다. 지난해 2월3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시인은 "죽음만이 찬란하다는 말은 수긍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타인들에겐 담담한 비극이 무엇보다 비극적으로 내게 헤엄쳐왔을 때 죽음을 정교하게 들여다보는 장의사의 심정을 이해한 적 있다. 나는 사랑했고 기꺼이 죽음으로 밤물결들이 써내려갈 이야기를 남겼다." 124쪽,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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