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의료법' 통과됐더라면…금속탐지기·뒷문 등 대안도(종합)

기사등록 2019/01/02 18:07:26

의료인 폭력 처벌 강화 '청원' 사흘만에 4만명 공감

【서울=뉴시스】박미소 수습기자 =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적십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고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빈소에 화환이 들어가고 있다. 고 임세원 교수는 30대 환자에게 정신과 의료 상담 중 흉기에 찔려 사망했다. 2019.01.02.  misocamera@newsis.com
【서울=뉴시스】강세훈 기자 = 서울 강북삼성병원 임세원(47)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외래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목숨을 잃은 사건을 계기로 응급실 뿐만 아니라 병원 전체에서 의료진 폭행을 막을 수 있는 법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2일 정치권과 의료계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27일 응급의료 종사자에 대한 폭행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당시 의료인 전체에 대한 폭행 처벌 강화법(의료법 개정안)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보류 됐다. 이후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비극적인 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지난해 심의 보류된 박인숙 의원 등이 발의한 7개 법안에는 의료인 폭행에 대해 징역형(벌금형 삭제)만으로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 등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응급실에서 대부분의 폭력이 발생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면서 응급의료 종사자에 대한 폭행 처벌 강화법(응급의료법 개정안)만 통과됐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입법조사관은 의료법 보류 이유에 대해 "환자의 생명이나 건강에 좀 더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게 응급실이고 그동안 사고도 응급실에서 일어났었기 때문에 먼저 응급실 폭행에 대해서 처벌을 좀 더 강화하는 쪽으로 하고 일반 의료기관 전체에 대해서는 좀더 순차적으로 논의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보건복지부도 "의료법 내 징역형만 내릴 수 있도록 규정한 사례가 없어 형량이 과도하고 법관의 양형판단권을 과도하게 제한할 우려가 있다"며 사실상 반대 의견을 낸 바 있다.

의료단체들은 지난해 말 의료인 전체에 대한 폭행 처벌 강화법이 통과됐더라면 예방 효과가 있어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다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의사협회의 한 관계자는 "응급실 뿐 아니라 전체 의료기관 내의 폭행을 근절해야 한다며 의료법, 응급의료법을 다 주장했는데 응급의료법만 통과가 됐던 것"이라며 "의료법이 통과 됐더라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지 모른다"고 말했다. 

의료계의 한 관계자도 "지난해 응급의료법을 통과시켜 놓고 추이를 본 다음에 의료법을 논의하자고 해서 계류를 시키는 바람에 의료법은 국회 복지위에 잠들어 있다"며 "의료법도 같이 통과가 됐더라면 예방 효과가 있지 않았겠느냐"라고 강조했다.

이번 사건 직후 청와대 국민청원 사이트에는 의료진 폭력에 대한 처벌 강화를 요구하는 청원이 올라와 공감을 받고 있다.

지난달 31일 시작된 이 청원에는 사흘만인 2일 오후 6시 현재 4만명이 넘는 사람이 청원에 동의했다.
 
이 같은 여론 탓인지 보건복지부의 입장도 작년 국회 심사 때와 많이 달라졌다.

【세종=뉴시스】한 동료 의사가 임세준 교수를 추모하며 제작한 그림. photo@newsis.com
보건복지부는 2일 배포한 참고자료를 통해 "응급실 내 의료인 폭행 방지를 위한 응급의료법 개정안이 지난달 27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바 있으며 일반 진료현장에서의 폭행 방지를 위한 의료법 개정안이 국회 계류 중"이라며 "징역형만 규정(벌금형 삭제), 형량하한제, 심신미약자 형 감경 면제 등 법적 장치 마련 방안에 대해서도 의료계와 함께 논의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올해는 의료인 폭행 처벌 강화법이 본격적으로 심의될 가능성이 커졌다.
 
국회 보건복지위의 한 관계자는 "논의 안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일단 계류하기로 한 것"이라며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다시 논의가 되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

하지만 처벌 강화가 사고를 막는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의료인들은 입을 모은다. 급기야 의료계에서는 자체적으로 가스총이나 호신용 스프레이, 방탄조끼를 구매해 스스로를 보호하는 수밖에 없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서울의 한 종합병원에서 일하는 의사 A씨는 "호신용 스프레이 하나만 있었어도 이렇게 허무하게 사망하시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당장은 의사 스스로 자체 무장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병원 내 금속 탐지기 도입, 청원경찰이나 경찰 인력 배치 등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다른 병원의 의사 B씨는 "흉기는 아예 소지를 못하도록 금속탐지기를 설치하는 방법이 그나마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고인이 활동했던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위급상황 시 의사들이 진료실에서 대피할 수 있는 뒷문 같은 안전장치를 두는 등의 대안이 포함된 법 제정도 추진하고 있다.

다만 일각에선 정신질환자 모두를 잠재적 공격자로 치부해선 안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서울 한 종합병원에 근무하는 응급의학과 의사 C씨는 "정신질환자의 범죄율이 정신질환이 없는 환자 보다 평균적으로  낮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정신질환자 전체를 문제 삼는 것은 또 다른 폐해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kangse@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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