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아렌스버그 부부 '뒤샹 컬렉션' 200여점 기증후 첫 순회전
필라델피아미술관-국립현대미술관 '뒤샹 사후 50주년' 회고전
'샘'·'계단을 내려가는 나부 No.2' 등 국내 첫 공개...150여점 전시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 “예술적이지 않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1915년 여름, 스물일곱살 뒤샹은 전쟁에 휩싸인 파리를 떠나 뉴욕으로 향했다. 이미 1913년 아모리쇼에서 입체회화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로 명성을 얻은 후여서 예술가의 스튜디오가 밀집해있던 브로드웨이가에서 작업을 할 수 있었다. 뉴요커가 된 그는 예술가·작가·지식인 무리로 늘 북적이는 컬렉터 루이스와 월터 아렌스버그 부부 모임에 합류했다. 체스를 잘했던 그는 이 그룹에서 스타로 부상했고 아렌스 버그 부부는 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아파트와 스튜디오를 제공하며 물심양면 지원했다.
뒤샹은 '작가가 손수 만든 것'을 중시하는 기존의 관념에 반기를 들었다. '그림을 직업으로 삼지 않겠다'면서 자신의 작업방식도 바꾸겠다고 다짐한다.
서른살 때, 세상을 뒤집었다. 그때 뒤샹은 뉴욕의 현대 미술을 위해 예술가가 운영하는 포럼인 독립예술가협회 창립멤버였다. 젊고 패기만만한 독립예술가협회가 민주주의와 수용성이라는 가치를 얼마나 수호하는지를 시험했다.
1917년 4월 '어떤 예술가든 6달러만 내면 작품을 전시할 수 있다'는 협회 첫 전시 '앙데팡당'전에 이름을 감추고 철물점에서 구입한 화장실 소변기를 출품했다.
작품 제목을 '샘'이라 쓰고, 'R. Mutt'라고 검정 물감으로 서명을 했는데, 이 사인은 뉴욕 변기 제조업자인 리처드 머튼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전시 감독들은 이게 작품이냐며 갑론을박을 벌였고, 급기야 '변기' 출품과 관련 투표까지 하기 이르렀다. 당시 협회 위원이자 뒤샹의 후원자인 수집가 아렌스 버그는 "우리는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며 변기에 찬성표를 던졌지만 조직위원회측은 “그것은 전혀 미술품이라고 할 수 없다”고 선언하며 '샘'을 전시하지 못하게 했다. 당시 대중들에게는 실제로 한번도 보이지 않은채 '변기'는 그야말로 핫이슈가 됐다.
'본래의 자리에 있으면 매우 유용한 물건이겠지만, 어떤 정의에 의해서도 그것은 예술작품이라 할수 없다'며 치워진 변기는 후원자이자 옹호론자인 아렌스버그 부부 덕분에 부활했다. 전시장에서 치워진 '굴욕 변기'를 아렌스 버그 부부가 사들였고, 또 잃어버리면서 복제의 복제가 시작됐다. 뒤샹은 새로 변기를 구입해 서명하고 아렌스 버그에 다시 제공했는데, 이때 변기는 '오브제가 아니라 아이디어를 지킨 것'이라고 해석됐다.
원작과 복제품의 차이는 무엇인가. 뒤샹이 쏘아올린 이 질문은 20세기 현대미술을 혼란에 빠지게 했다. '변기'는 개념미술의 원조가 됐다.
일반적인 상점에서 산 기능적인 물건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미술의 맥락에 들어온 뒤샹표 '레디메이드(ready-made)'의 발명이었다.
소변기 '샘'의 위력은 현재도 진행중이다. 영국미술가 500명이 ‘지난 20세기 100년간 후대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20세기 작품’ 1위로 뽑은 작품이다. '위대한 천재 예술가'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과 '팝아트 황제'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두 폭'을 누른 뜻밖의 결과였다.
'이게 작품이냐'며 쓰레기 취급됐던 소변기는 몸값도 올렸다. 1917년 굴욕시기를 거쳐 82년이 지난 1999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무려 1700만 달러에 낙찰됐다. 뒤샹의 작품 중 최고 기록을 세우는 순간이었다. 이 소변기는 1917년 제작된 바로 그것도 아니고 1964년에 새로 만든 8번째 에디션(복제품)이었다.
20세기 현대미술사 혁명을 이끈 그 소변기 '샘'을 실물로 볼 수 있는 전시가 서울에서 열렸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21일 마르셀 뒤샹전이 개막했다. 그의 대표작이자 현대미술사 최대 논란을 일으킨 남성용 소변기 '샘'부터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No.2)', 첫번째 레디메이드(ready-made) 작품 '자전거 바퀴' 등 150여점을 직접 볼 수 있다.
소변기 '샘'은 유리관에 쌓여 성전처럼 모셔졌다. 그 당시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대체 저것이 왜 예술이란 말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든다.
뒤샹은 '세상의 모든 회화는 보완된 레디메이드이고 동시에 아상블라주 작품'이라고 했다. 제품 쓰임새의 차이,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을 가져와 새로운 제목과 관점 아래 그 쓰임새가 사라지도록 한 것, 뒤샹이 그걸 해냈다. 화가의 전통적 역할에 대한 거부였다. 손재주를 작품에서 배제해 아이디어 자체를 전면에 내세운 레디메이드는 예술의 지적인 가치를 앞세운다. 쓰임새를 지닌 물건에서 벗어나 제조 상품들을 바라보는 경험, 예술적 맥락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시킨 것이다.
변기 '샘'을 계속 바라보면 뒤샹과 생전 함께 활동하며 그를 질투했던 피카소가 "그들(현대미술가)은 뒤샹의 가게를 약탈해 포장만 바꿀 뿐"이라는 말을 이해하게 한다.
변기 제목이 '샘'인 것도 아이러니다. 현대미술이 샘솟듯 변기는 20세기 미술의 화수분이 됐다. 뒤샹의 '레디메이드' 유산은 로버트 라우센버그, 제스퍼 존스, 리처드 해밀턴 앤디워홀, 제프쿤스등 팝아티스들을 비롯해 신사실주의와 플럭서스와 연관된 작가들에 의해 계승됐다. '키네틱 아트' 또한 뒤샹의 기계적인 실험을 발전시킨 장르다. 미디어아트 선구자 백남준은 평생 넘어서야 할 벽으로 뒤샹을 꼽으며 "마르셀 뒤샹은 이미 비디오아트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이뤘다"고 할 정도였다.
'예술적이지 않은 작품'을 끊임없이 만들게 하고, 작가 사후에도 세계 순회전을 할수 있는 건 후원자 덕분이다. 뒤샹의 후원자이자 수집가인 아렌스버그 부부의 공이 크다. 그들은 뒤샹 작업에 관여하기도 했고 수많은 작품을 구입했다.
화가에서 레디메이드 발명가로, 설치가로 조각가로 사진작가등으로 변신할 수 있게 후원한 월터 아르센 버그는 어떤 사람일까. 마르셀 뒤샹 회고록에 따르면 "아르센 버그는 하버드 출신으로 충분히 먹고 살 돈이 있는 시인이었다. "단테를 위해 그는 책 한권을 썼는데, 물론 자비 출판했다. 왜냐하면 이 책을 출판하고 싶어하는 츨판사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프란시스 베이컨 재단 또는 이와 유사한 것을 하나 설립했는데, 세익스피어 연극을 쓴 사람이 사실은 베이컨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죽고난 뒤에도 비서들이 계속 세익스피어의 암시를 찾는 연구를 할 수 있게 돈을 남겼다. 과학적으로 전혀 유효하지 않은 연구였지만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1950년대 아렌스버그 부부는 회화 조각등 '뒤샹 컬렉션' 200여점을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기증했다. 이때도 뒤샹과 함께 작품을 기증할 미술관을 선정했다고 한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만난 필라델피아 미술관 티모시럽 관장은 "그 이유는 그리스 신전처럼 생긴 미술관 전경 덕분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뒤샹은 신전처럼 보이는 필라델피아미술관을 보고 아렌스버그 부부에게 이 미술관이 내 작품을 영구히 보존할수 있을 것 같다는 서신을 보냈고 이후 기증이 결정됐다"
실제로 뒤샹은 자신의 작품이 한 기관에 소장되기를 원해 작품의 복제, 전시, 소장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했고 한다. 이 과정에서 뒤샹은 작품 설치 쿠레이팅 과정에 참여했고, 그의 최후의 작품인 '에탕 도네'는 뒤샹 사후 1969년 이래로 필라델피아 미술관에만 전시돼왔다.
"예술가라면 진정한 대중이 나타날 때까지 50년이고 100년이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 대중만이 제 관심사입니다."(마르셀 뒤샹)
티모시럽 관장은 "1954년 10월 아렌스버그 부부가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기증한 모던 아트 컬렉션이 대중에 첫 선을 보인후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뒤샹 미술관'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샹 작품의 집대성이라 할 아렌스버그 컬렉션 기증은 필라델피아 미술관 역상에 이정표가 되는 대사건이었다. 덕분에 필라델피아미술관은 모던아트에 관심있는 예술가와 학자들의 성지가 됐다"고 자부심을 보였다.
1875년 펜실베이니아 미술관으로 설립된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1938년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같은 규모로 미국의 7대 미술관으로 꼽힌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기증의 힘으로 이뤄진다. 티모시 럽 관장은 "25만점의 소장품은 80%가 컬렉터들의 기증품"이라며 "서유럽 고전회화인 존슨 컬렉션과, 근대회화의 아렌스 버그 부부 컬렉션, 타이손 컬렉션 등을 유치한 이후 모마미술관 못지않은 방대한 근대미술관으로 부상했다"고 소개했다.
이번 '마르셀 뒤샹전'은 필라델피아 미술관의 대표 컬렉션이 해외로 나온 첫 사례다. 일본 한국 호주등 아시아 순회전을 결정한 것과 관련, 티모시 럽 관장은 "아시아 예술가 100명이면 100명 모두 뒤샹의 작업에 영향받았다고 하더라"면서 "아시아에서 수많은 젊은 작가들이 더 좋은 작품을 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과 일반 대중들이 책에서 보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차이가 있어 이렇게 우리가 직접 나섰다"며 뿌듯해 했다.
그는 "뒤샹의 대표 작품뿐만 아니라 수많은 드로잉과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사진 등 그의 아카이브를 소개하는 대규모 회고전은 처음"이라며 "한국인들은 행운"이라고도 했다.
위대한 예술가를 탄생시키는 건 수집가(컬렉터)라는 말이 있다. 화랑이 작가를 발굴하지만, 결국 작가를 키우는 건 컬렉터다. 컬렉터가 있어야 작가도 살고 화랑도 살고, 그래야 미술시장에 피가 돈다.
특히 미술관에 작품 기증은 국가를 위한 일이다. 필라델피아미술관이 '뒤샹 미술관' 성지가 되어 세계 관광객과 예술인들을 이끄는 것처럼 미술관 수준은 소장품이 가늠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술관 예산이 관건이지만 해결책은 ‘미술품 기증’이 꼽힌다.
우리나라는 국민 1인당 소득 3만달러 시대가 됐지만, 여전히 미술품 수집가들에 대한 시선은 곱지않다. 물론 불법 상속의 목적이나 비자금 조성에 이용되는 사회적인 이슈들로 미술품 컬렉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확산시킨 배경도 있다. 개인컬렉터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은 2018년 현재 등록된 작품 8200점중 기증작품이 3786점으로 46%를 차지하고 있다. 연평균 50~100점이 기증되며 해마다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소장품 예산도 늘고 있다. 2013년 31억에서 2017년 61억, 올해 2018년 74억원이었다. 반면 지난 5월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김환기 화백의 '붉은 점화'(1972년) 6200만 홍콩달러(약 86억3000만원)낙찰된 것과 비교하면 정부 미술관 소장품 예산은 턱없이 부족하다.
미술품 기증·기부를 활성화하기 위한 정부의 지원 정책이 절실하다. 미술품 기증이 가장 활발한 미국은 기증 미술품 시가 기준해 최소 30%, 최대 90% 가깝게 세제혜택을 제공한다고 알려졌다.
1917년부터 민간기부와 민간참여를 증진시키기 위한 정책으로 ‘기부가 비영리단체를 통해 공공복지를 위해 쓰일 경우 세금을 대신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미술관 기증 미술품의 평가액만큼 세금을 공제해 주는 법률’인 언더우드 관세법(underwood tariff)의 시행으로 미술관에 대한 기부 및 기증사례가 급증했다. 미국 정부의 문화예술지원을 위한 ‘기부금 세제지원 제도’의 성공 요인으로 평가받는다. 현재 미국 정부의 ‘문화와 예술 분야의 육성정책’은 재벌 견제용으로도 적극 활용될 만큼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뒤샹 사후 50년에도 그의 대표작들이 온전히 보존되어 한국을 찾은 것처럼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작품에 대한 기증문화가 활성화되어야 할 시점이다. 미술품은 결국 국가자산으로 보존되고 후대에 물려지는 운명이다.
미술품 '소장'(수집)으론 한 명을 만족할 수 있지만, 기증은 수 만, 수백만명을 만족시킬 수 있다. 현대미술사 흐름을 바꾸고 고정관념을 깬 수천, 수억짜리 작품을 한자리에서, 단돈 4000원에 볼 수 있게 하는 '미술품 기증의 힘'이다. 전시는 2019년 4월 7일까지.
hyun@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