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씨 A4 14장 분량 진술서 45분 동안 읽어
진술 내내 눈물…일부 대목에서는 말 못 이어
"安 처벌이 나의 유일한 희망…간곡히 부탁한다"
안희정(53) 전 충남지사를 성폭행 혐의로 고소한 피해자 김지은(33)씨가 지난 3월5일 방송 폭로 이후 심경을 이같이 말하며 피해자 진술을 시작하자 방청석 곳곳에서는 작은 흐느낌이 터져나왔다. 김씨는 "모든 걸 미투 이전으로 되돌리고 싶었다. 나 하나만 사라진다면 없던 일이 되지 않을까. 조금만 더 참을 걸, 나만 아프면 되는데 지금은 모두가 아프다"고 토로했다.
김씨는 27일 오전 서울서부지법 형사합의 11부(부장판사 조병구) 심리로 열린 안 전 지사 성폭행·추행 혐의 결심공판에 피해자 진술을 위해 출석했다. 오전 9시56분께 안 전 지사가 법정에 들어섰고, 약 5분 뒤 검정 정장에 흰색 블라우스를 입은 김씨가 피해자 변호인 석 가운데 자리했다. 김씨는 머리를 뒤로 묶고,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김씨는 재판부를 마주보고 앉았고, 안 전 지사는 재판부 자리에서 왼쪽 좌석에 변호사들과 함께 자리했다. 재판 시작 전 두 사람은 모두 변호사들과 대화를 나눌 뿐 서로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김씨는 정면을 응시했고, 안 전 지사는 눈을 감았다.
오전 10시45분까지 검찰과 안 전 지사 변호인 측의 추가 증거조사를 마친 재판부는 약 10분간 휴정한 뒤 피해자 진술을 진행했다. 김씨는 마이크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해온 A4 14장 분량 진술서를 읽기 시작했다. 김씨가 공개 석상에서 이번 사건에 관해 입을 연 건 지난 3월5일 방송 폭로 이후 처음이었다. 진술이 시작되자 안 전 지사는 이내 안경을 벗고 의자를 돌려 앉아 눈을 감았다.
김씨는 "3월6일 고소장을 제출하고 5개월이 지났습니다"라는 진술 첫 번째 문장을 읽자마자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그러자 방청석 곳곳에서도 탄식과 흐느낌이 터져나왔다. 이날 303호 법정에는 약 60명의 시민이 자리했다. 재판을 취재하던 일부 기자도 김씨의 진술을 들으며 눈물을 보였다.
서서 진술서를 읽던 김씨는 지난 2일 열리 2차 공판에서 진행된 피해자 신문 과정을 언급하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는 "피고인 변호사는 '저 믿지 마세요. 피고인 변호사는 유도신문 할 수 있어요'라고 말하면서 저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아직도 그 표정이 안 잊혀진다"고 말하며 잠시 마이크를 내려놓고 눈물을 흘렸다. 이어 "신문 당시 안 전 지사가 차폐막 뒤에서 의도적으로 기침을 하며 압박했다"고 주장할 때는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에 안 전 지사는 괴로운 듯 시종일관 눈을 감고 얼굴을 만졌다.
오전 11시께 시작된 진술은 약 45분 동안 이어졌다. 김씨는 진술 내내 오열하면서도 ▲피해 기간 동안 느낀 심경 ▲폭로 이후 망가진 삶 ▲안 전 지사를 고소까지 하게 된 이유 ▲안 전 지사의 권력과 영향력 ▲안 전 지사의 이중성 등을 조목조목 짚었다.
김씨는 또 다른 피해자가 있음을 언급하고, '후배 중 한 명에게서 안 전 지사가 자신을 자꾸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또 다른 피해자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는 부분을 읽어나갈 때는 몸을 떨며 또 한 번 진술을 이어가지 못하기도 했다.
자신을 향한 세간의 비난에 관해 이야기할 때도 다시금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괴로워했다. 그러면서 김씨는 말했다. "사람들이 묻는다. '네 번이나 당할 동안 왜 가만히 있었느냐'고. 난 피고인에게 묻고 싶다. '왜 나를 네 번이나 범했느냐'고."
김씨는 재판부를 향해 "이 사건은 법 앞에, 정의 앞에 바로 서야 한다. 우리 사회의 한계로 피고인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면 피고인과 같은 괴물이 또 탄생해 대한민국을 갉아 먹을 것"이라며 "난 이제 직업도 잃었고, 갈 곳도 잃었다. 잘못된 걸 바로 잡는 게 내 유일한 희망이다. 공정한 판결을 간곡히 간곡히 부탁한다"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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