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 아트클럽]50년간 '동시성'..서승원 '도전과 침정의 반세기'

기사등록 2018/03/07 18:26:13 최종수정 2018/03/19 09:38:25
【서울=뉴시스】 서승원 <도전과 침정의 반세기> 전시전경,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2층

【서울=뉴시스】 박현주 기자 = 50년간 '동시성'을 천착하고 있는 그를 미술평론가 서성록은 "만리우보(萬里牛步) 작가"라고 했다.

  '소처럼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간다'는 뜻의 '우보만리'와 비슷한 말이지만 '만리를 소처럼 우직하게 걸어온' 서승원 화백(77)이다.

 1960년대부터 기하학적 패턴을 기초로 한 작품을 반세기 이상 탐구하고 있다. '새 것 콤플렉스’로 대부분 화가들이 10년 주기로 작업의 변화를 꾀하는 것과는 다른 행보로 세파에 편승하지 않고 화업을 이어오고 있다.

 50년~60년간 미니멀리즘에 집중했던 팔순의 화가들이 '단색화'로 재조명받고 위상이 달라지기도 했지만, LTE급으로 변하는 시대에서 한가지 주제의 작업은 양날의 검이다.

 단색화 거장으로 등극한 박서보 화백의 명언처럼 "예술이 시대의 산물이라면 변화해야 하지만, 변하면 또 추락"하는게 작품의 속성이다. 컬렉터나 감상자 입장에서는 지루함이 먼저 다가오기 때문이다.

 반면 장점도 있다. '그 작품 하면 그 작가'가 바로 떠올라 이미지 싸움인 미술시장에서 'OO 작가'라는 브랜드화 된다.

 그런측면에서 서승원 화백의 추상화 '동시성'은 '서승원'이다. 50여년간 '동시성'은 호밀빵에서 카스테라 처럼 변해왔다.

 기하학적 추상에 오방색을 접목해온 작품은 세월의 더께를 받아들인 듯 원색보다 파스텔화같은 부드러움으로 귀결되고 있다. 마치 안개가 낀듯, 또는 아지랑이가 피어 뿌옇고 아련하게 보이는 것 처럼 그림은 색과 형태가 분리되지 않고 완전히 밀착되어 있다.   

 서 화백이 추구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 ‘동시성’은 “형태와 색채와 공간 세 요소가 등가(等價)로서 하나의 평면 위에 동시에 어울린다”는 의미로, 예술가의 전위적 사명감으로 회화의 본질과 한국적 정체성의 확립을 위한 작가의 고민이 녹아 있다.


【서울=뉴시스】 Simultaneity 18-121, 80x100cm, Acrylic on canvas, 2018

  긴 시간동안 '동시성'은 변한듯 안변한듯 변해왔다. 색감과 형태가 점차 동시에 부드러워지며 화면을 채워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2000년대부터 작품은 깊이감이 한층 더 깊어졌다. 화면을 채우고 있던 명료한 마름모꼴도 흐트러지거나 종적을 감추고 부드러운 색채는 더욱 중첩되어 그 경계를 허문다.

 서 화백도 “모서리를 없애고, 색채도 저녁노을 같은 부드러운 빛의 표현”으로 대체했다고 했다.

 뭉개진, 흐릿한 그림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다 보인다. 멀리서 보면 안보이던 선들이 겹겹이 보이기도 한다. 실선과 마름모꼴이 얽히고, 색면들이 서로 포개져 있는게 '보이는데, 안보인'다. 그래서 평면 회화인데 입체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공간과 형태가 뒤섞여 희미해져 온화해진 절제된 화면은 과묵한 모습의 화백과 닮음꼴이다. 

평생 어떻게 '동시성'에 매달렸을까.

 서성록 평론가는 "인생을 살면서 작가인들 시련의 계절이 왜 없었겠는가"라며 "모든 정념을 떨쳐버리고 나 자신조차 내려놓을 때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존재할 수 있다고 선인들은 말해왔는데 이 말을 증명이나 하듯이 서화백은 오롯이 순수한 현존을 맛보고 거기에서 오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다"고 했다. 

 무엇을 쟁취하기는 쉬워도 그것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집착과 욕망과 작별하는 순간 더 심오하고 자유로운 세계가 열린다. 

 서 평론가는 "화면 바탕을 조성하는 데에 거듭된 정지작업(밑칠)을 하는 것에서는 ‘극기(克己)’의 자세랄까, 예스러운 회사후소(繪事後素)의 회화 정신마저 엿볼 수 있게 한다"고 평했다.

【서울=뉴시스】서승원 <도전과 침정의 반세기> 전시전경,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1층

  오랜 화업의 경륜이 말해주듯 그에게 그림은 단순한 직업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시종일관한 자세로 추상회화를 탐색해 '한국 추상화'의 물꼬를 텄다.

 1960년대 국내 화단의 주류였던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중심의 사실주의와 비정형 추상회화운동인 앵포르멜(Informel) 사이에서 독자적 경향을 모색했던 추상화가로 유명하다. 1950년대 말부터 불어온 앵포르멜(Informel) 선풍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야심 차게 기하학적 추상회화를 시도했다.

 1963년 기하추상회화 그룹 ‘오리진(Origin)’ 을 창설했고, 1967년 젊은 작가들이 파격적 시도를 대거 선보였던 '청년연립작가전'에 ‘오리진’의 멤버로 참여하여 사각형과 삼각형, 색 띠 패턴과 빨강, 노랑, 파랑 등 오방색(五方色)을 사용한 기하 추상 회화를 선보였다. 또 1969년 작업과 이론 모두에서 전위를 추구했던 ‘한국 아방가르드협회(A.G)’ 의 멤버로 활동하며 한국 화단에 새로운 미의식을 정립하고자 했다.

【서울=뉴시스】Simultaneity 77-59, 162x130cm, Oil on canvas, 1977

 예술가로서 끈덕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1970년대에 캔버스의 평면성을 고집하면서 색면과 선, 그리고 기하학적 요소로 구성된 정연한 공간을 밀고 나갔다. 이후 1990년대의 확산적 공간은 자신의 그림에 대한 확고한 철학없이는 나올수 없는 작업이라는 평가다. 

 한국 단색화의 신호탄이 된 동경 화랑 전시(한국 5인의 작가, 5인의 백색 전) 에 참여했고, '오리진', 'A.G', '에꼴드 서울', '서울현대미술제' 등 한국 현대미술의 물줄기를 형성한 전람회에 빠짐없이 참여한 일은 우리나라 미술 생태계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상을 짐작게 해준다. 

 ‘오방색’을 접목시키고 ‘중용’의 정신을 불어넣고, 문창살과 은은한 한지 등 우리의 ‘생활감정’에서 비롯된 작품을 예술로 승화시킨 일 등은 그가 현대미술을 자기화시키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 보여준다.

【서울=뉴시스】 서승원 화백.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제공

  서 화백의 작품세계를 한눈에 볼수 있는 전시가 8일부터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열린다.

  '도전과 침정의 반세기'를 타이틀로 50여년 화업의 중추인 '동시성'시리즈를 중심으로 총 23점을 선보인다. 최신작은 물론, 그간 전시장 나들이를 하지 않았던 1960년대 기하학적 추상 회화 작품부터 작가의 1970~80년대 대표작들이 대거 소개된다.  1960~1980년대 절제와 엄격한 질서를 보이던 작품이 주관적 해석과 자기화를 거쳐 사색과 명상, 자유의 화면으로 변화한 과정을 보여준다. 

 고희가 넘은 현재까지도 회화에 대한 고집스런 탐구를 멈추지 않고 있는 서승원 화백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전진해왔다. 50년전 의아했던 '동시성'은 21세기 융복합시대에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작품은 분명한 색상을 띠지도, 무언가를 발언하지도 않으며, 어떤 틀을 갖고 있지도 않다. 손에 잡힐 듯 그러나 손에 잡히지 않는, 마치 하늘의 뭉게구름처럼 화면에 그렇게 떠 있다.
 
  온화한 화면으로 '관조적 고요'를 전하는 그림은 평생 '동시성'에 매달려온 작가의 '화광동진(和光同塵])'한 예술혼을 보여준다.  4월29일까지.

 hyun@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