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박현주 기자 = 19세기 '회화의 시녀'로 불렸던 사진은 20세기 전성기를 구가했다. 사진은 버라이어티하게 영역을 확장하며 위세를 보였다.
10여년전 국내에서도 '그림같은 사진' 열풍이 불었다. 배병우·민병헌등 사진작가들의 존재감을 드높였고 작품도 유례없이 고가에 팔려나갔다. 하지만 '회화의 권력'은 뛰어넘지 못했다. 반짝 강등세를 보였던 사진 시장은 소강국면으로 접어들며 다시 회화의 부상을 알렸다. 구상에서 추상, 추상은 단색화로 인기몰이 하며 미술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사진이 주줌하고 있는 가운데 '조형 사진'이 등장 눈길을 끈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가 기획한 조형사진 작가 정재규의 개인전이 열린다.2월 2일부터 '조형 사진-일어서는 빛'을 주제로 사진과 설치 작품 100여 점을 전시한다.
사진은 '회화의 시녀'가 아니라 '회화의 동반자'라는 의미가 보인다. 작품은 설치 조각까지 넘본다.
작가는 한국의 고건축이나 조형물, 예를 들어 경주 불국사의 극락전, 대웅전, 석가탑, 다보탑, 돌사자상 등을 찍은 사진들을 자르고 재배열해 화면을 만들어낸다.
가나아트 김나정 큐레이터는 "사진을 찍고 인화한 이미지들을 자르고 조합하는 행위는 화면 속 정해진 시공간의 이미지뿐만이 아닌, 작가의 사적인 기억과 역사적 사건이 개입된 ‘시간의 올짜기’"라고 소개했다.
사진을 자르고 엮은 '조형사진'의 시작은 24년전 경주를 방문하면서 시작됐다.
국립 경주 박물관 뜰에서 머리가 없는 불상(佛像/無頭石佛)들 약 50여 구가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 모습을 접하면서다.
"예기치 못한 이 끔찍한 장면 앞에서 나도 모르게 얼른 사진 촬영을 하기 시작했다. 지난날의 끔찍한 불두 참수의 사건을 기록한다거나 다른 이에게 보이고자 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것은 순간적인 나의 반사 작용 같은 것으로서 참혹한 모습이지만 여전히 조화롭고 완전한 조형미를 갖춘 불상들을 또 다르게 볼 수 있는 한 방식 혹은 또 다른 시선의 한 선택이기도 했다."
카메라의 앵글을 통해서 보이는 머리 없는 불상들은 여전히 부동(不動)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 셔터의 소리와 함께 나는 불상의 그 참수 현장에 있는 듯한 인상을 순간적으로 느끼게 되었다."
작가는 "과거의 한 순간과 현재의 한 순간이 사진 촬영의 한 순간에서 서로 겹쳐지고 교차되는 듯 했다"며 "한여름 고요한 경주 박물관 뜰에서 동시성(同時性)에 대한 기이한 사진적 체험을 했다"고 밝혔다.
1978년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거주하며 작품활동을 하는 작가는 당시프랑스, 이씨ㅡ레ㅡ물리노의 아뜰리에로 되돌아와 머리 없는 불상들의 사진 이미지 절단 작업을 시작했다.
그 이미지들을 자르면서, 자르는 순간 순간들이 이번에는 경주 박물관 뜰에서의 그 촬영 순간과 겹쳐지고 교차되는 듯한 인상을 느끼게 되었다. 잘려져서 다시 배열된 머리 없는 불상 이미지의 표면은 사진적 사건을 위한 또 다른 장소( 또 다른 정원)로 여겨졌다는 것.
1974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한 작가는 1977년 제10회 파리비엔날레 참여를 계기로, 1978년부터 파리에서 살고 있다. 1980년대에 파리 1대학에서 수학하며 러시아 전위 미술 운동가인 말레비치의 절대주의(Suprematism)와 몬드리안의 기하학적 추상화 등 서양 미술이론 연구에 전념했고, 1990년 초부터 이론 연구를 뒤로 하고 본격적인 조형사진 작업을 시작했다.
사진을 잘라 엮어낸 '조형 사진'은 복제가능성과 복수성을 부정하고 순간성과 기록성이라는 정체성도 해체됐다. '이미지가 가지는 시공간 구조'에 집중했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 포장용 크래프트지 위에 수묵작업과 함께 복제된 이미지를 자르고 붙여 다양한 기호들을 조합하여 미술사를 재해석한 작품을 보여준다.
크래프트지 위에 동양의 수묵 기법으로 선을 그린 작업은 중국 명청대의 화가 팔대산인(八大山人, 1626~1705)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됐다. 또한 폴 세잔, 파블로 피카소, 마르셀 뒤샹, 만 레이 등 서양 미술가들의 작품을 사진과 크래프트지를 5~10mm 폭의 띠로 잘라 '올짜기 기법'의 조형사진과 설치작품도 선보인다.
누구나 사진작가인 이 시대에 정재규의 '조형 사진'은 신선한 충격을 선사한다. '찍기만 열중했지 왜 엮을줄을 몰랐을까' 라는 생각과 '별것 아닌데'라는 마음이 교차한다. 하지만 일반인들과 예술가들의 차이는 시간을 지배한다는 점이다. 소설가들이 '글은 엉덩이로 쓴다'는데, 미술가들도 마찬가지다.
그의 작품 평을 쓴 장-루이 푸아트뱅 미술평론가(소설가)는 "정재규의 작품은 느림에 대한 찬사"라고 했다.
"끝없는 인내는 조형작가 정재규의 일상적인 작업에서도 핵심"이라는 그는 "무한히 느린 시간으로서, 마치 맹점처럼 잊혀졌지만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이 ‘시간의 힘'을 정재규의 작품이 우리들에게 환기시켜 주는 것"이라고 평했다. 전시는 3월4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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