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미군은 정말 북한군의 남침을 몰랐을까. 이번 전시 기획위원으로 참여한 양영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연구부장과 함께 주요 문서를 살펴봤다.
◇미군, 북한 남침 알고있었다?
6·25 동란이 발발한 직후부터 미국 정부 내에서는 북한군의 남침 예견 실패를 놓고 책임 공방이 뜨거웠다. CIA, 극동군사령부를 비롯한 합동참모본부 등의 정보 부서들은 서로 책임을 회피하느라 바빴다.
그러던 중 '워싱턴 뉴스'가 1950년 9월 1일과 10월 5일에 "극동군사령부의 정보참모부장인 윌러비 소장이 1950년 3월10일에 북한군의 남침을 정확하게 예측했었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미 국무부 문서에 따르면, 미 극동군사령부가 "1950년 3월 10일에 6월 경 북한군이 남침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상부에 보고했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후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약속받아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개시했다.
◇소련의 한국전쟁 개입시 미 합참의장 브래들리의 복안
6·25 동란 초기인 1950년 7월10일 미 합참의장 브래들리 장군이 소련군이 전쟁에 개입할 경우에 취해야 할 방책에 관해 논한 문서다. 소련군의 개입은 곧 제3차 세계대전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신중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당시에 소련이 한국전쟁에 대한 개입을 극비로 추진하고 있어서 미 정보당국은 소련이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있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 문서는 미 합참의장 브래들리 장군이 소련군의 직접적인 개입이 확인될 경우 미군은 무조건 일본으로 철수하거나, 전면전을 준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음을 보여준다.
양 군사연구부장은 "전 세계의 정보력을 동원해서 소련군이 개입 여부를 판단, 직접 개입하지 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소련군이 개입할 경우의 정책 노선을 적은 문서"라고 설명했다.
1951년 2월 초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회담에서 중국과 소련이 6·25 동란에서 협력을 합의한 사항이 기록된 CIA 정보 보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해 4월5일 작성된 내용으로 ▲중국은 한국전쟁에서 포기하지 않으며, 전력을 다해 계속 싸운다. ▲중국은 50만 명의 병력을 추가 파견한다 ▲미국이 만주 폭격을 요청한 맥아더에 동의하는 경우 소련은 중소상호원조조약과 중소 동맹에 의거 일본의 미군 기지를 폭격한다 ▲한국 파병으로 중국 내 병력이 부족한 요새를 강화하기 위해 중국은 소련군이 중국 내에 주둔하는 것을 환영한다. ▲한국 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소련은 국제 의용군을 조직해 한국에 파병한다. ▲소련은 중국에 탱크와 트럭, 연료와 탄약 지원뿐 아니라 해공군 병력을 파견한다. ▲중소 국경의 주요 지점에 대규모 군수품 기지를 세운다 등의 내용이다.
양 군사연구부장은 "마오쩌둥의 모스크바 방문은 1951년 1월 말부터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으며,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회동은 6·25전쟁의 전개 양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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