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일제 식민치하에서 한국의 독립을 처음 명문화한 카이로 선언(1943년 11월27일)의 일등공신은 중국의 장제스(蔣介石 1887-1975) 총통이었다.
한국의 독립을 처음 언급한 것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지만 그는 신탁통치를 염두에 두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독립과는 거리가 있었다. 반면 장제스는 상해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과의 교류 등을 통해 한국민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누구보다 공감하는 입장이었다.
1909년 안중근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을 비롯해 1932년 이봉창의사와 윤봉길의사의 폭탄투척 등 한국 젊은이들의 잇단 의거는 8억 중국인들의 용기를 불러일으켰고 임시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갖게 한 촉매제이기도 했다.
재미현대사연구가 김태환 하버드남가주한인동창회장이 발굴·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장제스가 카이로선언에 합류하게 된 것은 루즈벨트의 의중이 주된 요인이었다. 루즈벨트는 일본 패망후 동아시아 안정을 위한 중국의 일정한 역할을 부여하기 위해 장제스를 연합국 수뇌부의 일원으로 참여시켰다.
장제스로선 큰 행운이었고 그와 긴밀한 임정으로선 하늘이 준 기회이기도 했다. 장총통이 곧 루즈벨트 대통령과 만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김구주석 등 임정요인들이 찾아가 한국의 독립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요청했고 장제스도 흔쾌히 동의했다. 다만 한국의 독립단체들이 분열된 모습을 보이지 말고 일치단결해줄 것을 요청받았다.
중국이 조선 독립 문제를 제일 처음 거론한 것은 카이로 선언 1년전인 1942년 11월 송자문 박사(Dr. T. V. Soong)가 외교 부장에 취임하고 가진 첫 기자 회견이었다. 김태환 회장은 "그가 만주와 대만의 중국 복귀를 주장하고, 조선이 전후에 독립 되어야 한다고 천명했는데, 사전에 장 총통과 협의가 있었던 것은 불문가지"라고 말했다.
장 총통은 이듬해 7월 임정 간부들을 맞이한 자리에서 한국 독립을 강대국 정상들과의 회의에서 합의를 얻도록 "힘써 싸우겠다(力爭)"고 약속했다.
그는 카이로 회의 출발전에 휘하의 두 기관에 의제를 준비토록 했다. 먼저 군사위 참사실에서 올린 의제로 중국 영토 회복 다음으로 조선 독립 승인 건이 올라 있었고, 국방 최고위 비서청에서 올린 의제에도 정치 부문에서 첫머리에 조선 독립 건을 내세웠다.
장제스의 한국독립에 대한 의지는 강고했다. 회담중 걸림돌이 발생할 경우의 전략까지 언급했는데 "조선 독립 조항이 미·영의 반대로 합의가 되지 않아 선언에 삽입할 수 없게 된다면, 중국 단독으로 일방적으로 일본 패망 후에 조선의 즉시 독립을 지지한다"는 강경한 방침을 정한 것이다.
김태환 회장은 "중국이 합의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들이 나름대로 정밀 분석한 정세 판단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첫째, 소련은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은 관계로 의견 제시가 어렵고, 인도 문제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염려되는 영국이 지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국 태도 때문에 미·영이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게 되면, 미국이 주저하게 되겠지만 중국이 독단적으로 조선 독립을 승인하면, 세계는 연합국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고 보게 되고 이러한 사태가 오기 전에 타협안이 나오게 될 것이라는 치밀한 시나리오였다.
결과적으로 카이로 선언은 중국의 판단대로 흘러갔고 장제스의 강경한 태도에 반대 입장을 피력한 영국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회담 후에 장 총통은 한국 독립 조항을 넣은 것을 자신의 '유례없는 외교적 성공 (Unprecedented Diplomatic Success)'이라고 일기(주간 회고 부분)에 적었을 뿐만 아니라, 11월말 회고 부분에서도 카이로 선언문과 관계된 다음 글을 실었다.
"보충해야 할 것은 '영국은 조선 독립 문제를 성명문에 넣어서는 안된다며 완강히 주장했고, 만주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이 만주를 포기하는데는 찬동하지만, 만주를 중국에 반환하는데는 한사코 말하려 하지 않았다. 우리(중국) 대표가 미국의 협조를 얻은 덕분에 이런 내용이 선언문에 들어갈 수 있었다..."
김태환 회장은 "이것이 조선 독립 조항이 카이로 선언에 들어가게 된 경위를 밝히는 결정적 단서이다. 야구로 치면 팽팽한 접전을 펼치던 중 '적시 안타(Timely Hit)'가 터졌다고 할 수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카이로 선언에 한국 독립 조항이 들어간 것은 김구 주석 등 임정요인들도 장총통을 통해 강하게 주문한 정도라고 할 수 있다. 특히나 이승만 박사가 한 일은 전혀 없는데 오늘날 한국의 일부 역사학자들이 있지도 않은 이승만박사 공헌설을 퍼뜨리고 있으니 어이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일본 패망후 즉시 독립이 아니라, 필리핀 식으로 위임 통치를 통한 단계적 기간을 거쳐서 독립을 부여하는 구상을 최초로 제시한 것은 장개석 총통에게 1942년 12월 보낸 서신이었다. 그는 1943년 3월 영국의 이든 외상이 백악관을 방문했을때에도 제기하여 영국의 동의를 얻었다.
전술한대로 중국은 카이로 회담에 참석하기 전에 이미 한국 독립 조항을 의제에 설정하였고, 11월 23일 로즈벨트 대통령과의 첫 번째 실제 회담에서 한국 독립을 강력히 추진하여 동의를 얻어냈다.
홉킨스의 초안에 장 총통의 복안이 바로 나왔기에, 영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중국이 강력히 밀어 부칠수 있었다. 결국 영국측이 자구 수정을 받아들여 한국 독립 조항이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았으나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김태환 회장은 "한국 독립 조항은 미국 과 중국의 의견이 합치해서 삽입되었으나, 시발점이 약간 다르다는 점을 감안하면, 장 총통이 '즉시 독립'에 더 적극적이었고, 루즈벨트는 궁극적인 독립에 동의하지만, 단계를 지나는 신탁 통치를 거쳐야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회담 후에 장 총통이 조선 독립 조항을 넣은 것을 자신의 유례없는 외교적 성공이라고 일기장에 까지 넣어 자랑스러워 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한국의 독립 조항이 들어 가도록 일심 전력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을 위한 카이로선언의 최대 공신은 장 총통의 손을 들어 줄 수 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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