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작가 츠쿠다 노리히코의 연극 '허물'은 같은 소재를 '연극적인 구성'을 통해 영상 매체 이상의 감흥과 여운을 안긴다. 캐릭터가 점차 젊어질 때마다 아예 다른 배우가 같은 인물을 연기한다. 작품 속 40대 아들 '다쿠야'(신용진)는 80대부터 20대까지의 아버지를 만나는데, 무려 6명의 배우가 '아버지'로 무대에 등장하는 것이다.
정점은 이들 아버지가 과거의 자신 또는 미래의 자신에게 핀잔을 주고 아쉬워 하고 농을 건네는 모습이다.
결국은 한 아버지로 수렴되는 여섯 아버지가 한 무대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며 밥을 함께 먹는 아날로그 판타지는 영상 매체의 판타지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박한 서정성을 안긴다.
어머니 '게이코'의 장례를 치르고 49제를 치르는 동안 젊어지기 시작한 아버지는 타쿠야에게 익숙한 아버지들과 낯선 아버지들로 나뉜다.
치매에 걸려 인지능력을 상실한 현재의 80대 아버지(임홍식), 다정다감했던 60대 아버지(정태화), 건강은 나빴지만 가장 열심히 살던 50대 아버지(조영선)는 그가 익힌 알던 모습이다.
하지만 여자를 좋아하고 자유로운 일상을 추구하던 40대 아버지(신안진), 앞날에 대한 꿈으로 활기가 넘치는 30대 아버지(반인환), 그리고 아들이 태어나기 전의 천진한 20대 아버지(조재원)는 그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결코 만날 수 없는 아버지의 오랜 과거다.
이들 아버지의 모습은 단편적인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의 전체 인생을 볼 수 있도록 퍼즐처럼 맞춰진다. 아버지를 한 때 미워하기도 했던 다쿠야는 그를 조금씩 이해해나간다.
전투기 레버에 껴 있던 머리핀이 계기가 돼 전투기를 몰던 아버지와 식당에서 일하던 어머니가 부부의 연을 맺은 것을 알게 된 그는 인생이 '우연과 때마침'이 아닌 '기적과 운명'으로 이뤄짐을 알게 된다.
극 초반과 막판 통틀어 달걀 10개를 우유에 넣어서 먹는 다쿠야 역의 신용진이 아버지에 대해 점차 변해가는 마음을 적확하게 연기하는 등 배우들 모두 호연한다. 그 중 가장 눈부신 건 하와이 풍의 옷을 입고 밝은 기운을 발산하는 어머니 게이코 역의 이경미다. 삶의 풍파에 따라 변해 간 아버지가 그래도 살 수 있었던 건 어머니 게이코 덕분이었는데 그녀는 젊고 발랄한 기운을 여전히 품은 채 삶을 마감하는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경미는 생명의 펄떡거림을 표정과 온몸으로 체화한다.
마지막에 다쿠야, 여섯 아버지, 게이코 등이 함께 노래를 부르고 국수를 만들어 나눠 먹는 판타지는 명장면이다. 다쿠야가 아버지 그리고 나락으로 떨어진 자신과 화해하는 순간이다. 국수가 경사가 있을 때마다 그런 삶이 길게 이어지길 바라며 먹는 음식이라는 점에 새삼 무릎도 치게 된다.
다쿠야는 자신이 접어 만든 뒤 날린 종이 비행기가 떨어지자 "추락"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새 삶을 기약하며 다쿠야와 이혼한 미츠코(김유진)는 다르게 말한다. "연착륙"이라고.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2005년 도쿄 '문학좌 아틀리에'에서 초연한 작품으로 국내에서는 지난해 한일연극교류협의회와 국립극단이 공동주최한 '제6회 현대일본희곡 낭독공연'에서 첫 선을 보였다. 정식 공연은 이번이 처음이다.
14일까지 서울 서계동 국립극단 소극장 판. '2015 국립극단 - 젊은연출가전'의 하나로 신예 연출가 류주연이 작품을 매만진다. 예술감독 김윤철, 무대디자인 구은혜, 조명디자인 박성희. 러닝타임 125분. 1만~3만원. 국립극단. 1688-5966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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