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시사회에서 벌써 이런 실망이 감지된다. 스펙터클한 광경을 기대했는지, 기나 긴 대사와 설명적 부분들에 지루함을 못 견딘 듯 휴대폰을 열고 문자메시지를 주고받거나 영화가 끝나기도 전에 나가버리는 이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왕자웨이 감독의 ‘동사서독’(1994)을 단순 무협영화인줄 알고 보러갔다가 욕지거리를 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 일군의 관객들 심정과도 같았을 것이다. 그러니 2시간20여분 동안 이어지는 감독의 묵시록적 대서사시를 참고 볼 마음가짐이 없다면 애당초 관람을 않는 것이 낫다.
‘노아’는 무려 1억3000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인 아로놉스키 감독의 첫 대작이기도 하다. 세밀한 심리묘사로 찬사 받던 그가 커다란 스케일의 영화에서도 얼마만큼 실력발휘를 할 수 있을는 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게다가 구약성서의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기독교, 유대교뿐 아니라 이슬람교까지 공유하고 있는 대홍수 전설로 대형 스크린으로 옮기는 시도는 주류영화로는 ‘노아의 방주’(1928), ‘푸른 초원’(1936), ‘천지창조’(1966) 이후 처음이다. 굉장한 시험대다.
결과는 종교극도 아니고 SF블록버스터도 아닌 괴상한 하이브리드 탄생이다. 천지창조부터 창세기의 내용을 곳곳에 끼워넣어 감각적으로 시각화했으나, 몇 줄 안 되는 ‘유대인 고대역사서’ 성경의 이야기만으로는 불충분했다. 노아의 인간적 모습과 가족구성, 행간 넘어 스토리는 모두 픽션과 상상력으로 메웠는데 이게 딱히 참신하지도 않다. 창세기에는 노아 부부와 세 아들과 세 며느리 등 8명이 살아남는 것으로 기록됐는데 이 영화에서는 둘째아들과 아직 어린 셋째아들의 배우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근친상간의 여지만 남겨놓아 갸우뚱하게 만든다.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도 아니고, 창세기 구절에 충실한 것도 아니면서 이를 벗어나지도 못하니 구성만 산만해졌다.
요즘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이 떠오를 때가 많다. 투자자와 제작사의 입김이 세다보니 안정적 흥행요소를 어떻게든 집어넣으려는 파라마운트와의 조율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감독은 자신의 작품관과 개성을 지키기 위해 파라마운트를 설득시켰다고 하는데, 그러면 이 정도 크기의 영화를 매끄럽게 연출하기에는 역부족이 아닌가 의구심도 든다. 더 나아가 꼭 블록버스터를 시도해야 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생긴다.
창조주가 천지창조 때 만들어낸 ‘빛’이 ‘타락천사’로 인간세상에서 주요역할을 한다는 설정이 가장 허구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창세기 6장4절에 나오는 네피림, 신의 아들들이 거인들로 묘사된 것에 상상을 보탠 것이다. ‘거인’ 혹은 ‘감시자’들이라고 불리며 진흙과 바윗덩이가 엉겨 붙어 만들어진 외형에 어기적거리는 몸짓을 하고, 노아의 협력자 역할을 한 후 외계로 돌아가는 불덩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실소가 나올만한 장면이다. 어디서 본 듯한 괴물 모습이라는 데서 더 그렇다. 영화 ‘호빗’에 나온 스톤 자이언트와도 비슷하다.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에덴동산의 뱀 등은 너무 현란한 그래픽 이미지라 유치하게 느껴진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노아가 인류가 멸망해야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굳이 해석해보자면 자기 가족만 살아남고 다른 인간들이 방주에 타려는 것을 막고 싸우면서 생긴 죄책감으로 인한 광기인 것 같다. 근데 왜 신의 계시를 혼자 저리 받아들이고 있는지 이해불가다. 미친 걸 이성이나 논리로 이해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영화 주인공에게 공감의 여지는 있어야하지 않나. 차라리 신의 음성이 뚜렷했다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러 가는 것도 그러려니 할 테지만, 노아가 이런 확신을 가지게 된데 대한 설득력이 부족하다. 갈등을 만들어내기 위한 억지 장치인 것만 같다. 어느 정도 선에서 마음이 바뀌어야할 것 같은데, 너무 많이 간다.
이건 신앙을 저버린 자체적 ‘광신’이다. 노아는 인간을 지구상 모든 생물체의 적으로 규정한다. 인류가 사라져야만 다른 생명들이 생존과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만물의 영장, 즉 모든 창조물의 주인이며 지배자라고 보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넘어선다. 생물들을 구하기 위한 신의 도구로 선택된 자신에 대한 부정이기도 하고, 자신의 악을 인정하는 심리의 표출이기도 하다. 현 인간문명이 자연을 훼손하고 결국 지구멸망을 가져올지 모른다는 현대인의 자각과 두려움을 선사 이전의 고대인에게 투영한 것이 낯설다.
‘블랙 스완’이 주로 내적갈등과 정신분열에 대한 영화였다면 스케일이 커진 ‘노아’에서는 외적갈등까지 더해진다. 아담의 아들로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의 후예로 청동기를 사용하는 두발 가인(레이 윈스턴)이 주적으로 등장하고, 아내 나메(제니퍼 코널리)와의 의견차, 첫째아들 셈(더글러스 부스)과 그의 아내 일라(에마 왓슨)와의 대립, 아버지에게 복수심을 지니게 된 함의 반항 등이 노아에게 고난을 더한다.
머리가 팍삭 셀 정도로 노아를 압박하는 심적 고통이 영화를 이어가는 중심축인데 마치 이 영화에 대한 감독 자신의 고심이 그대로 반영된 듯하다. 13세 때부터 대홍수의 생존자 노아에게 매혹됐던 감독이라고 하니 말이다.
노아의 아비 라멕에게서 두발 가인에게로, 두발 가인에게서 함에게로, 다시 노아에게 돌아온 에덴동산 뱀의 허물을 팔에 감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아담의 첫아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살인자였다. 두발 가인은 가인의 후손으로 세계로 퍼져나간 악을 상징한다. 노아는 아담의 셋째아들 셋의 후손이다. 하지만 그 뿌리는 아담과 이브로 하나다. 결국 인간은 원죄를 지닐 수밖에 없는 숙명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항시 기억하고 살아야한다는 것인가. 감독은 무책임하게 알아서 보고 싶은걸 건져 보라며 카오스 속으로 관객을 내던져버린다.
CG로 만들어낸 영화들에 질릴만큼 질렸는데, 표현력이 어색하지 않고 생생하다는 것은 큰 장점이다. 대형 방주와 여기에 실리는 온갖 동물들을 CG로 그냥 그려내는데 그치지 않고 직접 제작한 실물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방주는 수백명의 스태프가 뉴욕의 식물원 들판에 5개월간 6층 건물 높이로 제작했다. 대나무 장대로 만든 조형물 ‘빅뱀부’로 유명한 쌍둥이 아티스트 스턴 형제가 내부 대나무 구조물을 만들었다. 등장하는 동물떼 중 실제는 한 마리도 없다. 1차로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포유류, 파충류, 조류의 복제물을 만든 다음 CG를 통해 움직임을 부여했다.
세상을 모두 삼켜버릴만큼의 억수비를 표현하기 위해 비와 안개도 실제로 만들었다. 세트가 지어진 들판 전체에 지름 30㎝, 길이 900m의 거대한 물파이프를 심고 개당 8만5000ℓ 크기의 대형 물탱크 5개로 파이프에 물을 공급했다. 엄청난 양의 물은 지속적으로 재활용되며 다양한 사이즈의 헤드를 지닌 봉이 설치된 크레인으로 옮겨져 다양한 크기의 빗방울을 만들어냈다.
눈썰미가 있다면 외계행성처럼 보이는 촬영지가 요즘 할리우드에서 각광받는 로케이션지인 아이슬란드임을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프로메테우스’(2012), 벤 스틸러 주연·감독의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2013), 톰 크루즈 주연의 ‘오블리비언’(2013) 등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북극에 가까운 위치에 화산으로 형성된 지형과 토양색이 특이해 이국적인 느낌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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