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일부러 B급 감성, 자신감의 역설…수작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기사등록 2014/03/23 17:23:57 최종수정 2016/12/28 12:29:23
【서울=뉴시스】김태은 문화전문기자 = 지난달 베를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심사위원대상(은곰상)을 수상한 웨스 앤더슨(45) 감독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20일 개봉한다. 한국에서도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중적이지는 않은 웨스 앤더슨의 영화가 비교적 일찍 국내 극장에 걸린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1989)의 배경처럼 고풍스런 엘리트 교육을 하는 사립학교인 명문 프렙스쿨 ‘세인트존스스쿨’을 나왔고, 극중 에단 호크가 연기한 토드 앤더슨과 같은 성을 가진 앤더슨은 굉장히 독특한 지점에서 자기만의 독창적 세계를 만들어 냈다. 유럽 예술영화 같이 지적이면서도 미국영화적 B급 감성을 코미디로 풀어 넣었다. 점점 예쁜 동화처럼 알록달록한 색감과 장식적인 미술과 패션, 판타지적 미장센을 발전시켜나갔다.

 미국 독립영화의 메카인 뉴욕에 둥지를 틀고 있지만 파리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정도로 유럽지향적인 앤더슨은 영국과 독일의 제작지원을 받아 아주 특이한 영화를 선보였다. 미스터리 어드벤처로 분류할 수는 있으나 사실 스토리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관객으로서는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앤더슨의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재기발랄한 비주얼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랠프 파인즈, 틸다 스윈턴, 주드 로, 에이드리언 브로디, 윌렘 대포, 에드워드 노턴, 빌 머레이, 제프 골드브럼, 하비 케이텔, 오언 윌슨, 마티유 아멜릭, 레아 세이두, 시얼샤 로넌, 톰 윌킨슨, F 머레이 에이브러햄 등 유명 배우들을 한 자리에 모은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싶다. 뚜렷한 자기만의 색깔을 지닌 앤더슨의 영화계 위상과 신뢰도를 확인할만하다. 앤더슨은 이 주연급 배우들을 과감히 조·단역으로 운용한다.

 개인적인 동유럽 여행경험, 수많은 책, 영화들로부터의 감상, 특히 오스트리아의 작가 스테판 츠바이크(1881~1942)의 작품들, 한나 아렌트(1906~1975)의 ‘예루살렘의 하이히만’,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된 이렌 네미로프스키(1903~1942)의 ‘스위트 프랑세즈’(프랑스 조곡) 등 유대계 작가들에게서 영감을 받았다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출발부터 독특하다.

 현재를 사는 소녀가 어린이 드라마에서처럼 그냥 ‘작가’로 불리는 작가의 흉상 앞에서 책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펼쳐들면서 1985년을 살고 있는 중년의 작가(톰 윌킨슨)의 회상이 시작된다. 1968년 흉물로 변하기 직전인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젊은 시절 작가(주드 로)가 호텔 주인인 무스타파(F 머레이 에이브러햄)로부터 이 호텔을 물려받게 된 사연을 듣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액자 속 액자 구성은 또 다른 액자 속으로 이어진다. 무스타파가 젊은 시절 제로(토니 레볼로리)로 불리며 전쟁난민 출신 로비보이로 일하다가 콘시어지인 구스타브(랠프 파인즈)와 떠나게 된 모험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주배경은 유럽에서 파시즘이 태동하던 1932년, 주브로브카 공화국이라는 가상의 동유럽 국가다. 알프스 자락온천관광지에 세워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때, 세계 최고 부호인 84세 노부인 마담 D(틸다 스윈턴)가 이 호텔에 다녀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살해당한다. 공개된 유언장에는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명화 ‘사과를 든 소년’을 구스타브에게 증여하라고 한다. 마담 D의 유산을 노리고 있던 아들 드미트리(에이드리언 브로디)가 유력한 살해용의자로 지목해 체포된 구스타브는 탈옥, 제로와 함께 누명을 벗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드미트리가 고용한 무자비한 킬러 조플링(윌렘 대포), 헌병대 대장 헨켈스(에드워드 노턴)의 추격을 받는 동시에 세계 콘시어지의 모임인 십자열쇠협회 회원 아이반(빌 머레이)의 도움을 받기도 하는 등 다채로운 에피소드들이 펼쳐진다. 제로와 얼굴에 큰 점이 있는 멘들스 빵집의 제빵사 아가사(시얼샤 로넌)와의 산뜻한 로맨스도 곁들여진다. 주지해야할 것은 영화 곳곳에 나타난 파시즘의 그늘이다. 나치 친위대 문양을 패러디한 두 줄 번개모양의 휘장을 단 군대가 출연해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결국 비극을 야기한다.

 굉장히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가볍게 그려내는 재주를 지닌 앤더슨은 1930년대 격동기 유럽을 옛날이야기 들려주듯 굽이굽이 풀어낸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랑하는 이의 죽음도 희미한 추억이 된다. 덤덤한 결말은 경쾌하면서도 컬러풀한 한바탕 꿈을 꾼 것과 같은 느낌을 더한다.  

 사실 이 톡톡 튀는 영화의 줄거리에서 찾을 논리는 없다. 더 신경 써 봐야할 것은 의도된 B급 정서로 만들어낸 시각적 스타일이다. 핑크로 외관을 칠한 호텔의 첫 등장부터 범상치 않다. 알록달록한 캔디색깔이 주조로 등장하는 키치적 취향, 평소 굉장히 멋을 내는 댄디보이여서 게이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한 앤더슨의 탐미주의적 기호가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아가사가 만드는 달콤한 케이크부터 완벽하게 배열된 미술품을 연상시키는 소품들, 빈티지하면서 세련된 의상과 액세서리, 데칼코마니처럼 화면을 자로 잰 듯한 대칭구조까지 화면미학의 절정을 이룬다. 극중 1960년대는 와이드 스크린, 1930년대는 1.37대 1, 최근에 가까울수록 1.85대 1 등 당대 유행했던 화면비율로 촬영하는 완벽주의적 면모도 보인다.

 앤더슨이 연출한 애니메이션 ‘판타스틱 Mr. 폭스’(2009)는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었는데, 이 때의 제작진을 다시 불러 모아 이 영화 속에서 가장 큰 스케일의 스키 추격신을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냈다. 이러한 고의적 B급 제작방식은 코믹한 톤을 유지시키는데 일조한다. 여기에 미니어처 세트, 매트 페인팅(합성배경그림) 등을 활용해 만들어낸 장면들은 비현실적이면서 환상적 분위기를 잘 살려낸다. 

 이 영화에서 가장 놀라운 구경거리 중 하나는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2013)에서 추녀 분장으로 충격을 안겨줬던 틸다 스윈턴이 80대 과부로 변신한 것이다. 하루 5시간을 메이크업과 헤어분장에 들였다고 한다. 또 패션계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웨스 앤더슨 감독을 위해 명품브랜드 프라다가 지원사격에 나섰다. 마담 D가 사용하는 빈티지 여행가방, 조플링의 검은 가죽재킷 등을 프라다가 제작했다. 이 소품들은 베를린국제영화제 기간 프라다 플래그십스토어에 전시되기도 했다.

 tekim@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