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13년 마리오 프라다(Mario Prada)는 이탈리아 밀라노의 갤러리아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Ⅱ (Galleria Vittorio Emanuele II)에 가죽제품 판매 상점을 열었다. 그리 크지 않은 상점이었지만 창업주의 손재주와 노력을 남달랐다.
이같은 노력에 힘입어 상점을 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919년 이탈리아 왕가의 공식 공급업체임을 인증하는 사보이 왕가의 밧줄 로고 장식을 사용하게 된다.
당시에는 가죽 가방과 트렁크 등을 판매하며 왕가와 유럽 상류층에게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제1차·2차 세계대전과 경제 침체, 대공황 등의 영향을 받아 1970년대 말 쇄락의 길로 접어드는 등 위기를 맞는다.
그런 프라다를 일으켜 세운 것은 마리오 프라다의 손녀인 미우치아 프라다(Miuccia Prada)였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패션에 대한 공부는 전혀 한 적이 없는 정치학도였다.
그래서 미우치아 프라다는 이전에 패션계에 없었던 시도를 서슴없이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1978년 프라다를 이어받은 뒤 제일 먼저 했던 일은 가죽이 아닌 새로운 소재로 가방을 만든 일이었다.
이전까지 가방은 최고급 가죽이 아니면 명품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미우치아 프라다는 최고급 가죽을 보호하던 나일론 소재의 포코노 천을 가방으로 탈바꿈시켰다.
포코노천은 군용 낙하산과 텐트 등을 만들 때 사용하던 방수 천이었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부드럽고 실용적이기까지 한 이 소재를 놓치지 않았다.
포코노 나일론 백은 방수가 되는 것은 물론 쉽게 때가 타지 않는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아울러 활동적인 스타일, 우아한 이브닝 의상 등 다양한 스타일에 어울렸다.
검은색 포코노 천 위에 삼각형 프라다 로고가 전부였던 가방은 처음에는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점차 미국의 미니멀리즘(minimalism·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예술과 문화적인 흐름)과 맞물리며 1990년대 유행을 선도했다.
이후 프라다는 2009년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100개의 브랜드' 중 하나로 선정되며 명실상부한 명품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전 세계 70개국 388여 개의 직영 매장과 백화점 매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프라다. 한국에는 직영 매장 1개와 백화점 매장 22곳 등 모두 31개 매장을 운영 중이다.
프라다의 성공 요인은 모든 분야에서의 '혁신'에서 찾을 수 있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기존 규율을 뒤집는 접근법으로 그녀의 재능을 드러내고 있다.
가방은 물론 의류, 구두, 액세서리 등에 이르기까지 프라다는 전형적인 모습을 거부한 채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한다.
패션의 한계를 뛰어넘어 예술과 건축, 영화, 철학 등 다양한 분야와 협업하는 것 또한 역시 프라다가 입은 혁신의 한 단면이다.
프라다는 다른 산업과의 협업도 주저하지 않았다. 2007년과 2009년 LG전자와 함께 '프라다 폰'을 선보이는 한편 현대자동차와 함께 '제네시스 프라다'를 출시했다.
특히 예술, 건축과의 협업 시도는 1993년 폰다지오네 프라다(프라다 재단) 설립 이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이는 "현대 예술과 문화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지적인 도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프라다 트랜스포머는 임시 건축물 안에서 미술, 영화, 패션, 프라다의 문화 등을 주제로 네 가지 행사를 진행했다. 한 행사가 끝나면 바로 새로운 행사를 위한 곳으로 모양을 바꿨다.
6개월에 걸쳐 네 가지 모습으로 바뀐 프라다 트랜스포머라는 작품처럼 프라다는 끊임없이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며 프라다만의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 취재협조 : 프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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