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부 금융통서 로펌 '김앤장' 등 화려한 이력
부산저축은행 연류, 구한나라당 인맥 극복이 과제
【전주=뉴시스】정리/고석중 기자 = 19대 총선에서 전북 군산에 출사표를 던진 44살의 정치신인 김관영 예비후보를 만났다. 김 예비후보는 사법시험, 행정고시, 회계사를 패스해 3관왕의 신화를 쓴 인물이다. 국내 최대 로펌 '김앤장'에서 잘나가던 변호사로 활동하다 정치에 입문한 이유와 배경을 물었다.<편집자주>
-왜 국회의원이 되려하나.
"정치는 우리 일상의 삶 속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일이다. 제대로 공부하고, 준비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를 이끌어 나가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일에 나도 역할을 하고 싶다. 대한민국 정치에 희망을 주고 싶다. 정치에 식상해 있는 국민들에게 상생의 대안과 비전, 새로운 콘텐츠를 선사하고 싶다. 우리의 삶속에서 겪는 고민들을 이슈로 제기하고, 정책과 제도로 설계해 고민이 해결되는 기쁨을 국민들이 맛볼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
정치는 흔히 말하듯 권력투쟁이라기 보다는 입법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함께 모여서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문제점을 밤새 토론하고 그 다음날 국회에 가서 열심히 뛰어 개선점을 찾아내 법, 제도, 정책을 통해 해결책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수단이 바로 정치다. 국회의원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제도와 정책을 이끌어낼 수 있다. 법과 제도는 국민 모두에게 일반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안내자다. 이 역할을 하겠다."
-동기가 약하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군산엔 산적한 과제가 있다. 이를 해결하려면 중앙정부와의 네트워크도 필요하고 복잡한 사안을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된다. 이해 관계를 조정하고 소외된 이웃을 배려하는 것 등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이런 능력이 국회의원으로서의 자질이다. 이런 자질을 갖추기 위해 20년을 준비해왔다. 변호사로서 의뢰인에 귀 기울여 온 10년여의 경험과 세계적인 로펌에서 근무한 글로벌한 감각. 이러한 경험들을 나홀로 사익을 위해서만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깝다. 이런 소중한 경험이 군산을 위해 쓰여져야 한다며 많은 분들이 (출마를)권유했다."
-앞서 많은 준비를 했다고 했는데 어떤 준비가 됐나.
"준비됐다. 새만금 시대 가장 중요한 것은 기업유치다. 또 일자리 창출이다. 일자리와 기업유치를 제대로 하려면 국내와 세계의 유수한 기업과 끈끈한 네트워크가 있어야 한다.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네트워크가 중요하다. 서로 연결 통로가 있어야 한다. 내가 근무한 ‘김앤장’은 미국 포춘지가 선정한 세계 500대 기업 중 약 400개의 회사를 클라이언트(고객)로 가지고 있는 회사다. 이 회사들과 꾸준히 일을 해왔다. 800여 명의 전문가들이 그분들과 인적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다. 이런 회사에서 10년 근무한 경험과 네트워크로 기업 유치를 자신한다.
또 소통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데 군산의 어렵고 힘든 사람들의 목소리가 잘 전달되지 않는다. 이래서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불만이 큰 것 같다. 힘없고 어려운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려는 자세와 마음속으로부터 다가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것은 하루 아침에 형성되는 게 아니다. 10년 동안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고객의 말에 귀를 기우리고 고객의 입을 통해서 애로와 문제점들을 말하게 하고 이를 고민하고 문제점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찾아내는 노력을 해왔다.
중앙부처와 네트워크도 가지고 있다. 행정고시 합격해 기획재정부에 6년 근무했다. 고시 동기들, 선후배들이 현재 중앙부처에서 핵심적인 국·과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런 분들의 협조를 얻어내고 제대로 된 의견으로 그분들을 설득한다면 지역에 필요한 것들을 해결해 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정치 이야기를 해보자. 민주통합당 방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2012년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해야 한다. 그러려면 총선 승리가 꼭 필요하다. 야권 연대는 필수불가결하다. 자기 이익에 반하는 면이 있다고하더라고 정권교체라는 대명제를 위해 야권 통합은 꼭 이뤄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민주통합당의 출범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경선 방식에 대해서는.
"오픈 프라이머리(국민경선)를 하려고 하는데 정확히 모르겠다. 정치 신인의 입장에서 볼 때 100% 오픈프라이머리는 조직선거가 될 우려가 있다. 좁은 지역에서 경쟁적으로 많은 지지자들을 등록하도록 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후보들이 이런 고민에 빠져있다. 이미 조직과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유리하다. 신인은 쉽지 않다. 노인 비중이 높은 상황에서 20~30대에서 유행하는 모바일 붐을 일으키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100 %오픈 프라이머리보다는 배심원제로 평가를 했으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든다."
-현역 강봉균 의원이 버티고 있다.
"강봉균 의원은 개인적으로 경제기획원에서 모셨던 상사다. 첫 사무관 임명을 받을 때 1급 실장이셨다. 나중에는 장관으로 모셨다. 대한민국 경제정책에 관해서는 일가견이 있는 경제통이다. 민주당의 경제통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동안 지역을 위해 일도 많이 했다. 다만 연세가 드시니까, 뛰는 강도가 약했다. 열정이 젊었을 때에 비해 덜하다. 또 스킨십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 같다. 강 의원이 채워주지 못한 그런 부분을 열심히 채우려고 한다. 소통을 통한 스킨십, 열정과 패기로 3~4배 뛰려 한다. 이런 것이 무기다."
-함운경예비후보는.
"고등학교 5년 선배다. 대한민국 민주화를 위해 많은 기여를 했다. 정치도 오래했다. 대한민국 정치발전에 일정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함 선배님이 한편으로는 군산 분들에 대한 비전 제시와 평소 인간적인 관계에서 스킨십이 약하다는 평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시대의 흐름으로 볼 때 과거 투사가 필요한 시기가 있었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분들이 제대로 평가받던 시기가 있었다. 이제는 시대가 변해서 비전과 정책 대안을 제대로 마련할 수 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군산의 미래를 위해서."
-고시 3관왕라고 말한다.
"공인회계사와 행정고시, 사법고시를 합격했다."
-486이라고 표현할 수 있나.
"그렇다. 나는 486이다. 민주화투쟁에 앞장선 사람들을 통상적으로 386, 486이라 말한다. 사실 486은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고민했던 세대를 총칭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80번대 학번으로 60년대 태어나고 현재 40대가 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비슷한 고민을 해왔다.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대한 열정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겼는가. 발전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이런 고민들을 많이 했다.
87년에 대학 들어갔다. 1학기 때 데모 많이 했다. 민주화운동 시기였기 때문에 거의 서울 청계천에서 살았다. 6·29선언이 나오고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됐다. 이 점이 가장 중요했다. 민중의 힘을 느꼈고 민주주의로 가는 중요한 모멘텀(전기)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6·29이후에는 학업에 전념했다. 1학년 2학기에 공부를 시작했다. 구속되거나 체포되거나 하지 않았다. 운이 좋았다."
-바로 고시에 합격했나.
어떤 시험이든 경험삼아 본다는 생각은 삼가라는 것이다. 반드시 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하다. 1학년 2학기에 공부를 시작해서 2학년 때 된다는 생각을 못했다. 회계사 준비하면서 매달 모의고사를 봤는데 첫 번째 시험에서 회계학을 100점 만점에 4점 맞았다. 그때 교수님이 시험지 답안 밑에 이런 말을 써주셨다. 성적은 안 좋았지만 답안 작성 접근 태도가 맘에 든다고. 열심히 하면 좋은 성적을 낼 것을 확신한다고. 이 격려를 받고 열심히 공부했다. 거기서 느낀 것은 격려가 중요하며, 포기하지 말고 도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2차 시험을 봤는데 회계학에서 40점을 간신히 넘었다. 과락을 간신히 넘은 것이다. 이 점수는 최소한의 점수였다. 39.97점을 받아 떨어진 동료가 있다. 얼마나 극적인가."
-행정고시는 언제 합격했나
"회계사 합격하고 겸손을 배우게 되었다. 3학년 때부터 인생의 시련이 시작된다. 3학년 때 행정고시 1차 떨어지고 4학년 때 1차에서 또 떨어졌다. 그리고 겨우 대학원 가서 1차 시험되고 그 다음해에 2차 시험에 합격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군대는 안 갔나. 사법시험도 합격했는데.
"행정고시 합격하고 재경부에 들어갔다. 재경부 다니다가 군대에 갔다. 육군 사령부에서 육군 회계사 장교를 뽑았다. 그래서 장교로 갔다. 사법시험은 군대에 있는 동안 공부를 해 이뤄낸 성과였다. 다행이 장교였기 때문에 저녁에 공부할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제대로 된 공무원이 되고 싶어서 처음에는 상식으로 법을 공부했다. 공무원이 생각보다 법을 많이 다룬다. 법을 알아야 제대로 된 공무를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공부하다 보니까 재미가 있었다. 교양삼아 공부하기 보다는 시험을 준비하면 훨씬 밀도 있게 공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사법시험을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저녁때 매일 7시간씩 3년동안 공부했다. 퇴근해서 6시에서 새벽 1시까지. 매일 공부했다.
군대를 제대하던 98년 4월에서야 사법시험 1차에 합격했다. 앞서 두 번이나 떨어졌다. 재경부에 복직 했고 근무하면서 2차 시험공부를 했다. 98년 7월 복직했는데 1년 정도 공부했다. 사실 제대로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당시 1차시험을 합격한 동생과 2차 시험을 같이 준비했다. 동생은 풀타임 공부를 했다. 동생이 공부한 것을 복사해 금요일 저녁마다 만나 주말에 공부했다. 토요일과 일요일에 주로 공부를 했다. 운좋게 동생과 같이 99년에 치른 2차시험에 합격했다. 현재 동생도 로펌에서 근무하고 있다. 나라법인 대표 변호사를 맡고 있다."
-'김앤장'엔 언제갔나.
"99년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2000년 사법연수원에 들어갈 때 재경부를 휴직했다. 2년 사법 연수를 마치고 재경부로 다시 들어오려 했다. 그런데 연수원 다니는 도중에 ‘김앤장’에서 연락이 왔다. 스카웃 제의였다. 깊은 고민 끝에 옮겼다.
사실 공직에 있을 때 ‘김앤장’이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몰랐다. 실제 가보니까 잘 옮겼다는 생각을 했다. 재경부 직원이 700명인데 김앤장 직원이 2000명이다. 그리고 재경원 사무관 이상 250명인데 김앤장이 변호사, 회계사 등 전문가만 800명이다. 팀플레이의 중요성과 글로벌 마인드를 기르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고민했다는데 이직 동기는.
"첫 번째는 앞으로 대한민국 중요 흐름으로 볼 때 공직도 중요하지만 민간 부분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재경부는 공직이다. 민간 부분의 경험을 쌓고 공직은 언제든지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공직 기여는 앞으로 기회가 많을 것으로 봤다. 민간 경험은 지금이 아니면 못한다고 판단했다.
사실 현실적 이유도 있었다. 아들이 3명이다. 그러다 보니까 시골에서 아무 것도 없이 시작한 사람으로서 경제적 문제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경부 공무원하면서 3명 먹여 살리기가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로펌에 가면 경험도 쌓고 급여도 많으니까, 민간 경험도 하고 먹고사는 문제도 해결하겠다고 생각했다."
-김앤장에 부정적 시각이 있다.
"충분히 이해한다. 김앤장에 변호사만 400명이다. 하는 일이 굉장히 광범위하고 많다. 신문보도처럼 재벌만 비호하는 것이 아니다. 돈 받지 않고 변호하는 일도 많다. 변호사가 많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나는 서민 금융과 관련된 일을 많이 했다. 금융전문가였는데 은행, 증권, 저축은행, 대부업 이런 것들에 대한 자문을 많이 했다. 10년 일했다. 조세 문제도 많이 다뤘다."
-맡은 것 중에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사건은.
"최근 문제된 저축은행 일을 한 적이 있다. 저축은행의 정상적인 영업과 경영 건전성 유지를 위해 사실 감독기관하고 서로 의논도 많이 했다. 실제로 업계에 있는 분들과 의논도 많이 하고 나름대로 저축은행을 살리려고 노력을 했지만 구조적 부실대출문제 때문에 역부족이었다. 일부는 영업정지가 됐다. 저축은행 사람들이 일을 다 저질러놓고, 즉 부실대출을 이미 한 상황에서 문제가 되면 우리에게 살려달라고 온다. 처음부터 투자에 관한 의사결정 단계에서 상의했다면 리스크 관리를 자문했을텐데 일을 다 저질러놓고 수습해 달라고 오는 것이다. 그러면 변호사가 할 수 있는 수단이 상당히 제한될 수밖에 없다. "
-부실한 저축은행을 비호했다는 견해가 있다.
"저축은행 사태에 내가 책임있다는 소리가 들린다는 말을 들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문은 실상을 모르고 하는 추측성 음해다. 나는 저축은행이 제대로 운영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했다. 저축은행을 살리려고 경영 정상화방안도 세웠고 노력도 많이 했다. 저축은행중앙회가 조성한 구조조정기금 관리위원으로 참여하면서 기금 운영 문제에 있어서도 저축은행중앙회와 많은 협의를 했다. 저축은행이 정상화될 수 있는 여러가지 방향을 모색했다. 그러나 저축은행의 부실이 너무 컸다. 사실 부실이 일어나는 과정까지 그 사람들에게 미리 어드바이스할 기회가 없었다. "
-부산저축은행 매각건을 맡게 된 경위는.
"당시 부산저축은행이 영업정지 당한 다음에 예금자들이 항의하면서 부산저축은행 서류를 가져갔다. 입수한 서류 중에 캄보디아 공항 프로젝트을 매각하는 자문 계약이 있었다. 부산저축은행 캄보디아 공항 프로젝트에 파이낸싱(투자대출)을 한 것이다. 규모는 약 700억원이다. 부산저축은행과 맺은 매각자문 계약서에 김앤장에서는 나와 강윤구 변호사가 당사자로 되어 있다. 이 프로젝트가 진행이 잘 안되니까 대출금 회수가 안됐다. 이런 상황에서 부산저축은행이 우리를 찾아왔다. 이 프로젝트를 팔아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을 빨리 팔아야 은행이 살아난다는 논리였다. 그래서 매각을 우리가 자문하게 된 것이다. 당초 삼일회계법인이 매각 자문을 맡았는데 못 팔았다. 그러니까 금융위원회에서 이 프로젝트를 김앤장에게 맡기라고 한 것이다. 김앤장이 네트워크가 좋으니까. 사실 정부가 맡긴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부산저축은행이 우리에게 찾아왔다. 부산저축은행을 살리려는 계획 아래 매각 인수를 받아 자문계약했다. 프로젝트의 매각업무를 맡은 것이다. 사무실에서 담당변호사로 지정이 됐다. 예금주들이 이 계약서를 입수를 하면서 무슨 소문이 돌았냐하면 ‘700억원이 투자 형식으로 해외로 나갔는데 그 일부를 부산저축은행 대주주들이 빼돌렸다. 전부가 해외에 다 집행 되지 않았다’는 소리가 돌았다. 투자할 때는 우리가 관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우리는 매각관련 자문계약만 맺고 업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계약서를 예금자들이 입수하면서 마치 김앤장이 해외 프로젝트에 처음부터 연관된 것처럼 소문이 났던 것이다. 민주당이 당시 계약서의 내용을 살펴보지도 않고, 사실관계를 전혀 알아보지도 않고 막연히 해외프로젝트에 관한 매각자문계약서에 김앤장 이름이 나오니, ‘김앤장’이 관련돼 있다는 막연한 추측성 의심을 한 것이다. "
-실제 국회 조사특위 증인으로 채택되지 않았나.
"당시 증인 채택은 안됐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국정 조사 특위를 추진하면서 민주당의 증인 채택안에 내가 들어가 있었다. 최종적으로 한나라당과 협상이 무산되면서 최종적으로는 증인 채택이 되지 않았다. 증인채택이 되었다는 것도 허위 사실이다.
당시 민주당이 계약서의 내용을 보지도 않고 선정적인 말을 썼다. ‘부산저축은행의 임직원 재산 은닉 해외 재산 도피 의혹 관련 증인 채택’이라고 썼고 그 밑에 ‘김관영’이라는 이름이 있다. 완전히 추측에 의해 기재한 것이다. 마치 임직원이 재산을 은닉하는데 관련이 있는 것처럼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대검에서 배포한 보도자료에 의하면 부산저축은행 조사자만 무려 3387명이었다. 구속 기소된 사람이 42명이고 기소된 사람만 전부 76명이 됐다. 그런데 우리는 조사를 받은 적이 없다. 전화온 사실도 없다. 수사팀 내에서 정상적인 사람들은 내가 부산저축은행건에 연루됐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좌우명은.
"긍휼히 여기는 삶이다. 기독교적이다. 옛날 성경말씀에 이런 말이 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을 받으리니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다. 다른 사람을 긍휼이 여기면 자기도 긍휼을 받는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보살피고 하는 것이 결국은 자기를 위하는 것이다.
항상 기뻐하고 감사한다. 인생의 큰 좌우명이다. 힘든 일이 있어도 감사하고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더 생각하고. 공부하고 힘들 때도 공부할 수 있는 것 그 자체가 큰 기쁨이었다. 고향에서 어머니 아버지가 농사짓는 것도 행복하고 감사하다."
-인생을 보면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다.
"생각보다 어려웠다. 끼니 굶고 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용돈을 받아본 적이 없다. 학원 한번 가 본적이 없고 집에서 농사일 하면서 여름에는 논에서 밭에서 통상적으로 가마니 짜고 산에서 나무하고 이런 삶을 살았다. 여름에는 소 먹일 풀 베고 가장 전원적인 생활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족은
"부모님이 생존해 계시고 농사일을 하고 계신다. 6형제다. 내가 5번째다. 집안이 넉넉치 않아 첫째형부터 넷째형까지 다 지방에서 대학을 나왔다. 다섯째인 내가 처음 서울로 올라갔다. 내가 서울 가기 5개월 전에 큰 형이 서울로 직장을 잡아서 큰 형 집에서 기거하며 살았다. 서울로 간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첫째로 가장 큰 변화는 농사일에서 해방됐다는 것이었다. 기쁨이었다. 두 번째는 새로운 세계를 맞봤다는 것이다. 대학가면서 서울을 처음 가봤다. ‘이런 세계가 있구나’. 처음 느꼈다."
-아내는.
"대학교 다닐 때 교정에서 만났다. 캠퍼스 커플이었는데 괜찮은 여자가 있어 선배에게 소개시켜 달라고 부탁해 4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신앙인이고 아내도 가정이 어려웠다. 가정 환경이 많이 비슷했다. 고시 공부하는데 많이 도와줬다. 힘들 때 많이 격려해줬고 그것이 사랑의 씨앗이었다.
아내는 교사를 11년간 했는데 애를 3명 낳고 그만두었다. 아들만 3명 두었다. 주위에 여자가 귀하다. 집 사람이 아들 3명을 낳을 때 아내에게 위로했다. 하나님에게 내 주위에 여자는 당신 하나만 두라고 하신 것이라고. 내 평생에 당신하나만 두고 봐야지 딸도 질투할까봐 주지 않으셨다고 위로했다."
-서울 출마는 생각 안했나. 군산을 선택한 이유는.
"군산에 내려온 이유가 있다. 신영대―함운경―강봉균 후보가 실력있고 경력도 좋은데 왜 서울서 하지 군산까지 내려오느냐고 말한다.
군산은 마음의 어머니이고 고향이다. 저를 키워 준 곳이 군산이다. 이 고향을 위해 소중한 경험과 자산을 바치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고 본다. 사실 강봉균 의원은 거대한 산이다. 1년 전 군산을 내려올 때 강 의원은 건재하고 있을 때였다. 그 전부터 내려오려고 결심했다. 강 의원과 싸워 보겠다고 결심한 것은 군산 시민들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어서였다. 군산은 우리의 주인이다. 정치 행위의 주인이 시민이라는 인식을 심고 싶었다.
군산 시민들이 소외감이 있었다. 만나보니까. 자기가 힘들고 괴로운 것을 전달할 수 있는 소통 수단이 없었다. 내가 이야기를 해도 막힌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정치인으로 중요한 것이 소통하는 마음과 원칙이다. 초심을 잃으면 안 된다. 따뜻한 마음이다."
-선거 조직에 한나라당 출신들이 있어서 정체성 논란이 있다.
"저를 돕는 분들 중에 과거 강현욱 전 도지사를 도왔던 분들이 있다. 나는 7년 전에 아무런 이해관계 없을 때 민주당에 입당했다. 평당원으로 활동하면서 민주당 정강과 정책을 후원했고 당비도 밀린 적이 없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남북관계와 중산층이냐 서민이냐 하는 문제, 대기업 우선이냐 중소기업 우선이냐, 노동문제 등에서 차별화 된다.지속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해온 사람이다.
또 복지에서 보편적 복지냐 선택적 복지냐. 이런 부분에서 나는 민주당 정책을 지원했고 민주당이 맞다고 생각한 사람이다.
정치적으로 자기를 지지하지 않은 사람을 포용했다고 해서 정체성이 훼손되었다는 소리가 있지만, 그 분들의 의견도 수렴해서 민주당 정강 정책과 맞는 그런 정책을 만들어 낼 것이다. 제 나름대로의 색깔 있는 정책을 만들어내고 지역어른들의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겠다."
-군산 유권자에게
"군산에 뼈를 묻고자하는 젊은이의 열정에 힘을 보내 달라. 시민과 함께 대한민국의 인물로 커 나가겠다."
대담 / 심회무 취재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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