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사형집행인들이 이런 구경거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형집행에는 단두대, 사지를 찢는 방법, 물에 빠져 죽이는 방법 등이 있다. 좀 무시무시하지만 사람의 머리를 자르는 집행 얘기를 해보자.
이런 직업인이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과정이 있는데, 하나는 대대로 대물림으로 전수되는 것과 다른 하나는 16살부터 시작해서 탄탄한 실전교육 끝에 마이스터 증을 따고 집행인이 되는 방법이다. 이때부터 이들은 정식 집행인으로 등록되고 지켜야 할 의무와 권리가 부여된다. 첫 전문 증명서를 가진 이는 1276년의 독일 아우그스부르크의 사형집행인이라고 사료에 나온다.
이 직업도 결코 쉬운 직업은 아닌 듯 하다. 만약 이들이 형 집행때 단칼에 목을 베지 못하면 즉각 민중들의 지탄을 받고, 일이 더 잘못 될 경우에는 그도 동료들에 의해 한방에 죽임을 당한다. 사료 속에 나타난 얘기들을 들추어보면, 15세기 중엽 독일 아우그스부르크 민중들이 단칼에 목을 베지 못한 사형집행인에게 돌을 던지며 성밖으로 몰아치다 결국은 막대기로 때려 죽였단다.
1501년엔 빈에서 같은 이유로 화가 난 군중들이 사형집행인을 죽인 후 그 시체를 들고 온 도시를 돌았다 한다. 독일 쾰른에서 일어난 더 상세한 사록을 보자. 1513년 1월10일 9시께 쾰른 시장이 얼굴에 검은 천이 씌워진 채 군중 앞에 꿇어 앉아 사형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때 등장했던 사형집행인이 한 칼에 목은 베었으나 유감스럽게도 베인 시장의 목이 서서 구경하고 있던 민중 쪽으로 굴러가 버렸다. 이 실수 때문에 사형집행인은 그의 동아리에서 즉시 쫓겨났다.
이들의 신분은 불명예스러운데다가 최하의 천민에 속한다. 이들은 사형 집행인이라는 표징을 나타내기 위해서 늘 붉은 오버코트를 입고 다녀야만 했다. 일반인들이 우연히 이들과 마주치면 피해 지나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나쁜 기운이 전달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선술집에 들어갈 때는 직업을 신고 하고 가야함은 물론이요, 그곳에 있는 일반인들에게 양해까지 구해야 한다. 허용되더라도 이들은 한 귀퉁이에 떨어져 놓인 의자와 탁자에 앉아야 하고, 벽에 늘 걸려 있는 식기와 컵을 사용해야만 한다.
1546년에 일어났던 얘기가 전해 내려온다. 술에 잔뜩 취한 한 수공업자가 사형집행인과 같이 식당에서 음식을 먹었다. 이 이유로 그 수공업자는 자격증도 뺏기고 동시에 동아리에서 쫓겨났단다. 이 치욕을 감당하지 못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얘기다. 이들은 성곽 내에서 살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까지도 일반인들과 구별해 정해진 다른 장소에 앉아야 하고, 공중 목욕탕에 가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그들의 결혼식이나 장례식이 교회에서 거부 당하고, 일반인과의 결혼도 금지 당한다. 그러니 결혼은 주로 이들과 유사한 신분에 있는 박피업을 하는 사람끼리 이루어졌다.
그들의 자식들은 일반 애들과 격리되어 놀아야 하고, 마누라가 애를 낳을 때는 조산원도 못 부른단다. 이들은 시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잡일도 처리해야만 했는데 어린애들을 죽인 살인녀들을 생매장도 해야 하고, 거리의 똥이나 똥 구덩이까지 치워야 한다. 개 잡는 것도, 좀도둑 처벌도, 불치병 환자를 시 밖으로 쫓아내는 일도 그들의 몫이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시에서 일어 나는 모든 더럽고 어려운 잡일은 그들의 몫이다.
이들이 비록 사회에서 푸대접 속에 살지만 유일한 특권 아닌 특권이 있다. 다름아닌 여러 갈래를 통해서 짭짤한 부수입을 올리기에 가난에 허덕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부수입은 주로 의료 행위를 통해서 번다. 뼈 구조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습득한 이들이기에 다쳤다거나 부러진 곳을 잘 고친다. 대개 치료 목욕사나 의사를 통해서 더 이상 고치지 못한 환자들이 이들에게 와서 치료 받는다. 아마 우리가 서양의학의 한계를 느낄 때 다시 제 3의학을 찾는 것과 유사 할 것이다.
또 다른 짭짤한 부수입원의 줄은 가난한 죄인의 유골을 챙기면서이다. 이들은 죽은 이들의 몸에서 뽑아낸 굳기름을 재료로 하여 연고를 만들어 팔기도 하고 피는 피부질환이나 간질병 특효약으로, 피부는 관절염 환자에게 제공했단다. 그 외에도 이들은 야생식물의 효능을 잘 알기에 신비하고 비밀스러운 처방으로 조제한 연고도 환자들에게 팔아 수입을 올린다.
전해 내려오는 재미있는 남녀간의 사랑 얘기도 있다. 어린이를 살해한 한 소녀가 사형을 선고 받았다. 담당 사형집행인이 그때 마침 아팠기에 이 집행을 독일 로텐부르크에서 온 젊은 사형집행인이 대신 맡게 되었는데 이 남자는 사랑에 빠져 그녀를 도저히 죽일 수 없었단다. 이때 그는 시장에게 모든 수수료를 일체 받지 않을 테니 이 죄인을 살려서 자기 아내로 삼을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그 허락 과정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진행되었는지는 모르나 아무튼 시의원회가 조건적으로 수락했다 한다. 사형집행인으로서 지켜야 하는 서약과 의무를 포기하는 각서를 쓰고 소녀와 함께 영원히 이 도시를 떠나라고….
사형집행인 중에는 여성도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독일엔 17세기 중반에 남편 대신 그 마누라가 교수대에 메인 두 도둑을 사형집행 했다는 기록도 있다. 독일의 마지막 사형집행인은 단두대로 3000명이 넘는 사람을 처형한 요한 라이히하르트(1893~1972)라고 전해진다.
비교종교학 박사 ytzm@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