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현대사 산 증인' 페레스 전 이스라엘 대통령 타계

기사등록 2016/09/28 14:34:48

최종수정 2016/12/28 17:42:15

【자파=AP/뉴시스】시몬 페레스 전 이스라엘 대통령이 28일(현지시간) 93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은 지난 2월 8일 이스라엘 자파에 있는 페레스평화센터에서 포즈를 취한 고인의 모습. 2016.09.28
【자파=AP/뉴시스】시몬 페레스 전 이스라엘 대통령이 28일(현지시간) 93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은 지난 2월 8일 이스라엘 자파에 있는 페레스평화센터에서 포즈를 취한 고인의 모습. 2016.09.28
【서울=뉴시스】강지혜 기자 = 28일 오전 3시(현지시간) 별세한 시몬 페레스 전 이스라엘 대통령은 총리직을 2차례 역임(대행 포함 3차례)하고 역대 정부에서 국방·외무·재무장관을 지낸 이스라엘의 저명한 원로 정치인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이다.

 이스라엘 및 중동지역 현대사를 논할 때 페레스를 빼놓을 수는 없을 정도로 고인은 막대한 역할과 영향력을 행사했다. 초기에는 강경파 성향으로 강력한 자주국방 정책을 추진함은 물론 점령지에 유대인을 정착시키고자 노력했지만, 1970년대 후반 이후에는 대화를 기반으로 팔레스타인 및 아랍 국가들과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 온건파로 바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페레스는 1923년 8월 2일 폴란드 비슈니예프(현 벨라루스 비시네바)에서 태어났으며,1934년 가족과 함께 당시 영국이 위임통치하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텔아비브에서 자랐고 벤 셔먼에 있는 농업고등학교에 다녔다.

 키부츠 게바에서 수년간 공동생활을 했고 키부츠 알루모트를 만들었다. 뛰어난 연설 능력과 조직력을 인정받아 1943년 청년 시오니즘 노동자당 서기로 선출된 페레스는 이듬해 키부츠 알루모트로 돌아와 농부와 양치기로 살았다.  

 페레스는 1947년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 다비드 벤구리온에 의해 발탁돼 독립 전쟁 초반 병력과 무기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으며 국가 요직에 진출했다. 독립 전쟁이 끝나고 건국을 선포한 1948년 불과 25세 나이에 해군 총수로 임명됐다. 2년간 재직한 뒤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유학했다.

 1953년 초대 총리였던 벤 구리온에 의해 29세의 젊은 나이에 국방부 국장으로 임명됐다. 이스라엘과 프랑스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핵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 주력했다. 1956년 제2차 중동전쟁(일명 '수에즈 위기')에서는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는 작전을 총괄했다.

 1959년에는 국회의원으로 선출돼 크네셋(의회)에 진출했다. 2007년 6월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의원직을 유지했다. 1965년 다비드 벤구리온과 함께 마파이당을 탈퇴하고 라피당의 사무총장이 됐다. 1967년 이들 당을 통합해 노동당을 만들었다.

 1969년 이스라엘 이민부 장관이 됐고 점령지를 개발하는 임무도 부여받았다. 1970~1974년 운송·통신부 장관을 지내고 1974~1977년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1977년 노동당 당수로 선출돼 1992년까지 자리를 유지했다.

 페레스는 이스라엘에서 총리와 대통령직을 모두 역임한 첫 인물이었다. 1984~1986년, 1995~1996년 2차례 총리를 역임했다. 1984년 총선에서 리쿠드당 당수 이츠하크 샤미르와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총리로 취임했다.

 연정 구성 당시 샤미르와 교대로 총리직을 수행하겠다는 합의에 따라 1986년 퇴임하고 1988년까지 부총리겸 외무장관으로 활동했다. 1988년부터 연정이 해체됐던 1990년까지는 부총리겸 재무장관으로 일하면서 1982년 레바논과의 전쟁으로 타격을 입은 경제를 회복하는 데 주력했다. 이스라엘 최대 노동조합인 히스타드루트의 협조를 얻었고 400%까지 치솟았던 인플레이션율을 16%까지 내리는 데 성공했다. 레바논에서 이스라엘 군을 철수하고 레바논 남부에 소규모 보안 구역을 형성하는 데도 기여했다.

 노동당은 1992년 총선을 통해 다시 집권했다. 이때 페레스는 외무장관으로 취임했다. 외무장관으로 재직하던 1993년 9~10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출범의 기반이 된 오슬로 평화협정을 체결·발효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이츠하크 라빈 당시 이스라엘 총리,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과 1994년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1994년 10월에는 요르단과 평화협정을 맺는 데 기여했다. 페레스는 자신의 '새로운 중동' 비전에 따라 중동·북아프리카 지역에 있는 아랍 국가와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듬해인 1995년 총리직에 다시 취임했다. 국방장관직도 함께 맡았다. 이는 총리였던 이츠하크 라빈이 같은 해 11월 4일 암살되자 후임을 맡은 것이다. 노동당이 페레스를 차기 총리로 추천했고 크네셋이 투표를 통해 최종 확정했다. 당시 모든 의원으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7개월간 총리직을 수행했던 페레스는 1996년 노동당이 총선에서 패하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에는 팔레스타인과의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스라엘 항구도시 자파에 페레스평화센터도 세웠다. 센터 설립의 목적은 유대인과 아랍인의 상호이해와 공존을 도모해 중동 지역의 사회·경제 발전을 꾀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과 아랍 협력국 사이의 합동 프로젝트는 경제와 문화, 교육, 보건, 농업, 언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시됐다.

 2001년 외무장관에 다시 취임한 그는 2005년 11월 노동당 당수로 재선출됐다. 제17대 크네셋 총선을 앞둔 2006년 카디마 당으로 이적했다. 2007년 6월 13일 제9대 대통령으로 선출됐고 2014년 7월 24일 퇴임했다.

 페레스는 2012년 6월 13일 세계 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을 받았다. '더 넥스트 스텝'과 '엔테베 일기' 등 10권의 저서를 남겼다. 배우자 소냐와의 슬하에 딸 1명과 아들 2명을 낳았다.

  페레스는 지난 9월 13일 뇌졸중을 일으켜 중태에 빠졌고 텔아비브의 병원에서 집중 치료를 받았지만 28일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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