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드로잉쇼로 폭발적 인기
크리스티 경매서 1200만원 낙찰도
베르베르와 책 만화화 프로젝트 준비
그림을 그리는 그의 손놀림은 마치 물 흐르듯 막힘이 없다. 히트 친 만화가 있어 수천 번씩 그린 캐릭터를 반복해 그리는 것도 아니다. 그릴 때 참고하는 자료나 사진도 없다. 그저 어떤 주제나 단어가 주어지면 그걸 매개로 캐릭터 뿐만 아니라 공간과 배경까지 창조해낸다. 머릿 속에 있는 모든 시각적 이미지와 눈앞의 모습을 즉각적으로 화면에 담아낸다.
어떤 그림은 사람과 동물과 기계가 마치 유기체처럼 뒤엉켜있다. 유럽이나 일본, 미국의 그래픽노블 뿐만 아니라 르네상스시대 벽화나 천장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다양한 이야기가 응축돼있는 그의 원화는 지난 4월 영국의 크리스티경매에서 최고 1200만 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올 하반기에도 해외전시가 예약돼 있으며, 현재 세계적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파라다이스’에 삽화를 그린 게 인연이 돼 새로운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최근에는 할리우드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오는 28일까지 국내 첫 개인전 ‘Kim Jung Gi x Drawing’을 열고 있는 김정기 작가를 최근 청담동에 있는 ‘레스빠스71’에서 만났다.
- 언제부터 밑그림도 없이 그림을 그리게 됐나?
- 라이브 드로잉쇼 동영상이 화제가 되면서 전 세계로 활동무대가 넓어졌다. 라이브 드로잉쇼를 하게 된 계기는?
“그것도 우연이었다. ‘슈퍼애니’(www.superani.com)소속 작가인데 2011년에 부천국제만화축제에 슈퍼애니 부스를 차렸다. 슈퍼애니 운영자이자 ‘애니 창아’ 공동대표인 김현진 선생께서 그 때 3면에 종이를 붙여놓고 그림을 그려보라고 하셨다. 행사 기간 내내 그림을 그렸고 그걸 촬영해 유튜브에 올렸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이후 프랑스, 미국 등지에서 러브콜이 쏟아졌다. 일본은 '아키라’로 유명한 오토모 가츠히로 선생이 작가들 모임에서 제 동영상을 보라고 추천하셨더라. 무라타 유스케 작가가 그걸 보고 한국으로 저를 만나러왔고 친구가 됐다.
“해외에서 드로잉쇼를 하면 일반관객보다 작가가 더 많이 온다. 신기해한다. 어째서 가능한지는 저도 모르겠다. 그냥 유치원 때부터 달랐다. 다들 평면으로 그리는데 전 입체로 그렸다. 제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림은 정말 많이 그렸다. 어릴 때 아버지가 달력을 뜯으면 그건 무조건 내차지였다. 뒷면에 빼곡히 그림을 그렸다. 전 여섯 살 때부터 만화가가 꿈이었다. 당시 선물 받은 스케치북 표지그림이 토리야마 아키라의 ‘닥터슬럼프’였는데 그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들었거든. 이후에도 그림은 정말 많이 그렸다."
- 얼마나 그렸기에?
- 국내 만화계는 일본만화와 친숙한데 작품을 보면 유럽의 그래픽노블이 연상된다.
“전 눈 크고 만화적인 그림체보다 사실적인 것을 선호했다. 르네상스 시대 명화집을 보면서 그 사실적인 누드에 열광했다. 일본만화의 영향도 받았다. 지금도 SF나 메카닉, 밀리터리물을 좋아한다. 유럽만화는 대학 가서 처음 접했다. 충격이었다. 미국만화는 히어로물 보다는 언더그라운드 만화를 더 좋아했다. 당시는 만화할건데 싶어서 중퇴해버렸는데 서양화 전공하면서 시야가 더 넓어졌다. 앞선 문물은 어릴 때부터 많이 접했다. 방학 때마다 서울 친척집에 올라와 명동의 외국 서적 파는 곳을 들락거렸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부산 보수동으로 책 사러 다녔다. 요즘도 자료는 정말 많이 모은다. 오전에는 웹서핑하면서 계속 자료만 모은다. 그걸 반복해 보면서 머릿속에 입력한다.
"14,15 곳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았다. 국내 시장에 안 통한다고. 덕분에 지금은 해외 일을 더 많이 한다. 라이엇게임즈의 신사옥에 가면 로비에 제 그림이 걸려있다. 거기서 나온 게임 캐릭터와 그곳 직원들이 일하는 모습을 라이브 드로잉쇼를 하면서 그렸는데 그걸 확대프린트해 로비에 걸어둔 걸 페이스북에 올려놨더라. 요즘은 디씨코믹스에서 표지작업 및 캐릭터 디자인 의뢰가 들어온다. 미국의 사이드쇼라고 피겨 만드는 회사에서도 일을 준다. 현재 세부조율단계지만 곧 할리우드SF영화의 비주얼 콘셉트 아티스트로 참여할 예정이다." (그는 고현정이 주연한 영화 '미쓰GO' 속 애니메이션 작업도 한 바 있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새로 하는 프로젝트는 무엇인가?
- 전업 작가로 먹고 살기가 쉽지 않다는데 완전 예외인 것 같다.
“저는 운이 좋게도 그림 그리면서 경제적으로 힘든 적이 없었다. 그림 실력을 인정받아 재수할 때부터 미술·만화학원 강사를 했고 이후 부산에서 서울로 진출했는데 전국에서 가장 몸값이 비쌌다. 20대에 한 달에 최고 600~700만원까지 번 적도 있다. (보통의 경우와 달리) 전 학생을 가르치는 일이 즐겁다. 강사를 한 게 그림을 계속 그린 원동력이 됐다. 강사하면서 그림도 많이 늘었다. 한때 ‘입시풍 만화’로 통할 정도로 제 그림체가 전국 미대지망생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애들 입시성적이 좋으면 기쁘고, 또 애들이 그리는 것을 보면서 배우는 것도 많다.”
- 지난 5월 일본 도쿄의 카이카이 키키 갤러리에서 오타쿠 문화를 현대미술에 접목해 명성이 높은 무라카미 다카시가 기획한 ‘GEISAI∞infinity'전에 참여했다.
"다카시가 자신은 제 그림이 좋은데 전시가 성공할지는 긴가민가했는데 2주 동안 2000명이 와서 성공적인 전시가 됐다. 원화를 1억 원 어치 정도 판매했다. 최저 50,60만원부터 최고 700, 800만원. 가로 1m50㎝에 세로 1m20㎝ 캔버스에 그린 그림은 1000만 원 받았다. 크리스티경매에서도 2년 연속 팔았다. 한국전설을 주제로 한 그림으로 처음에는 820만 원에 팔렸고 지난 2월에는 1200만 원에 낙찰됐다. 요즘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아트토이나 만화 원화, 일러스트에 관심이 많다. 프랑스 만화가 뫼비우스 그림은 1장에 1억 원 한다. "
- 한국의 다른 만화가나 일러스트레이터와 달리 새로운 성공모델을 만들고 있는데 젊은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많이 보고 듣고 (자료를) 모아라. 그림을 많이 그리는 것은 기본인데, 그릴 때 사물을 이해하면서 그려야 변형도 쉽고 자기 색깔도 찾을 수 있다. 또 국내시장만 보지 말고, 시야를 넓혀라. 제 페이스북 팔로워가 10만 명인데, 거기에만 제 일러스트북을 올려도 어느 정도 팔린다. 우리나라 작가는 작품 보여주는 걸 부끄러워하는데, 자기 작품을 해외에 많이 알려라. 자꾸 보여줘야 한다. 실력이 부족해도 자꾸 보여주고 피드백을 받아라. 결코 부끄러워하지 마라. 한국작가들 실력 있다. 그리고 키덜트 시장이 향후 유럽처럼 우리도 커질 것이다. 그걸 염두에 두고 자기 것을 준비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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