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항복, 원자탄 아니라 소련의 참전 때문" LA 김태환회장

기사등록 2015/08/10 14:18:31

최종수정 2016/12/28 15:26:17

"미국, 소련 의식해 원자탄 투하" 주장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미국이 일본에 두 발의 원자탄을 투하한 것은 소련의 남하를 의식한 것이며, 일본이 항복한 결정적 원인은 원자탄이 아니라 소련의 전쟁 선포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LA의 현대사료연구가인 김태환씨는 나가사키(長崎) 원폭 투하 70주년인 9일 뉴시스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항복은 1945년 8월6일과 9일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에 연속 두 개의 원자탄을 맞은데 따른 것이라고 대부분이 믿지만 항복의 결정적 이유는 소련 때문이며, 미국은 소련의 대일 참전에 앞서 항복을 받으려고 불필요한 원자탄을 투하했다"고 밝혔다.

 김태환씨의 이같은 주장은 뉴욕 타임스가 8일 '잊혀진 도시 나가사키(Nagasaki, the Forgotten City)' 제하의 사설에서 "히로시마 원폭 이후 사흘 뒤에 투하된 나가사키 원폭은 이미 일본이 항복 문서를 조율하는 상황에서 이뤄졌다"며 "일본의 항복이 소련의 선전포고로 예견됐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라고 보도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뉴욕 타임스는 "나가사키 폭탄 투하 30분 전 일본의 최고군사회의는 항복 문구를 논의하고 있었다. 스탈린의 선전포고는 좀더 우호적인 내용을 소련으로부터 얻으려는 마지막 희망을 끝내게 했다"고 덧붙였다.  

 뉴욕 타임스가 사설을 통해 숨겨진 역사의 이면을 들추었다면 김태환씨는 직접 발굴한 각종 사료에 의거해 구체적 사실들을 적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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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일본이 항복 의사를 미국에게 전달한 시점에 관한 부분이다. 기존의 정설은 일본이 히로시마에 첫 번째 원폭을 맞고도 항복 의사를 표명하지 않아 사흘 뒤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폭을 투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전후 최소한 천황제라도 존치하기를 바라는 등 항복 조건을 최대한 유리하게 끌고 가기위해 미국을 상대로 '시간 끌기' 작전을 벌였으나 소련의 선전포고로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일본은 소련에게 일종의 트라우마가 있었다.

 김태환씨는 "일본은 '종이호랑이' 중국을 만주에서 와해시키고 괴뢰국을 세운 후 1938년 최정예 관동군이 조선, 만주, 소련 삼국의 접경인 장고봉 지역에서 소련 국경수비대를 집적대다 소련의 기계화부대에 크게 혼쭐이 났다"며 이른바 '장고봉 사건(張鼓峰事件·하산호전투)'을 언급했다.

 "이듬해 만주와 외몽고 사이의 노모한이라는 조그만 도시 근처의 경계가 확실하지 않은 곳에서 외몽고 기병대가 말에 목초를 먹이려고 가는 것을 만주쪽 관동군이 국경 침범이라고 사격한 것이 양쪽에서 몇 개 사단씩을 동원하여 거의 전쟁 규모로 커졌다. 당시 외몽고는 소련의 보호국인 셈이어서, 훗날 독일 베를린을 함락시켜 소련의 영웅으로 불리는 주코프 사령관의 기계화 부대가 관동군 1개 사단을 섬멸시켰다. 일본은 소련에 연이어 참패를 당하는 바람에 독일을 도와 소련을 협공하는 유혹을 물리치고, 소련과 중립조약을 맺고 1941년 4월 남진책으로 매진하게 됐다."

 1945년 5월 동맹국 독일이 항복하고 일본도 항복의 시기와 조건을 저울질하는 상황에서 소련의 선전포고는 일본열도에 소련군이 진주할 수도 있다는 공포감을 심기에 충분했다. 김태환씨는 "영어 일어 러시아어에 정통한 하세가와 추요시 UC 산타바바라대 교수가 저서 '적과의 경쟁(Racing the Enemy)'에서 '일본은 원자탄 때문에 항복한 것이 아니라, 연합국과 종전을 중재해 줄 것으로 믿었던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후 무서운 속도로 만주를 휩쓸고, 거의 모든 정예 관동군을 섬멸, 그 기세로 일본 본토쪽으로 진군한다면, 막을 도리가 없으니 본토만이라도 미국의 보호를 받는 쪽이 낫다고 판단해서 항복하게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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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려진 대로 소련의 2차대전 참전은 미국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에 선전포고하자 일본의 동맹국 독일이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고, 미국은 태평양 지역에서 일본과 싸우고, 유럽과 아프리카에서는 독일 등과 싸우게 되는데, 루즈벨트 대통령은 유럽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독일을 먼저 항복시키고, 일본의 항복을 받도록 전쟁 구상을 해나갔다.

 두 개의 큰 전쟁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서라도 소련의 참전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김태환씨의 말이다.

 "카이로 회담(1943년 11월)이 끝나자 루즈벨트와 영국의 처칠이 이란의 테헤란에서 소련의 스탈린을 만나, 제2 전선 형성(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1944년에 실행하도록 합의했다. 그때 소련의 대일 참전 확약을 받는데, 시기는 대독 전쟁 종료 후로 잡았다.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이 역사적인 노르망디 상륙 작전(1944년 6월 6일)을 성공시켜 독일의 패망이 눈 앞에 보일 무렵, 루즈벨트와 처칠, 스탈린이 크리미아 반도 휴양지 얄타에 모여 대독 전쟁 마무리와 소련의 대일 전쟁 참여 및 보상책을 논의했다. 스탈린이 독일 항복 3개월 후에 대일 참전을 확약하자 루즈벨트는 소련의 대일 참전 보상책으로 한반도에서 소련의 점령구역(Occupation Zone)을 약속하고, 종전 후 미·영·중·소가 20~30년 간 신탁 통치를 한후에 독립시키자고 제안했다. 소련의 대일 참전 문제가 담겼기 때문에, 얄타회담 문서는 베일에 가려져 얄타 비밀협정으로 통칭되었고, 1955년에야 미 국무부가 발표했다. 발표 내용에 한국 관계 조항이 없었던 것은 비밀의정서에 정상 간의 구술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이 트루먼의 보좌관인 헤리 합킨스에게 '한국의 4개국 신탁통치안을 준수하겠다'는 내용은 이를 두고 한 것이다."

 ◊ "일본 얄타회담 직후 미국에 항복 의사 전달"

 루즈벨트는 훗날 소련의 대일전 참전 요청을 후회하게 되는데 얄타회담 직후 일본이 항복 의사를 비공식적으로 전달해 왔기 때문이다. 수년 간 사실상 미국 홀로 수행한 2차대전에서 다 된 밥에 소련의 몫을 떼어주게 생긴 미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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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과적으로 소련은 얄타 비밀협정에 의거, 독일이 항복한 5월9일로부터 정확히 3개월 뒤인 8월9일 대일 선전포고를 했고, 전의를 상실한 일본이 8월15일 항복하기까지 불과 엿새만에 한반도 이북과 일본 북방 4개 섬을 차지한 셈이 되었다.

 일본이 항복을 전제로 협상했음에도 원자폭탄이라는 끔찍한 공격을 당한 것은 소련의 대일 참전이 이뤄지기 전에 항복을 받아야겠다는 미국의 조급증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또한 김구 주석이 일본의 급작스러운 항복 선언에 땅을 친 일화에서 보듯 대일 선전포고로 전승국 대열에 서려 했던 상하이 임시정부도 얄타 비밀협정과 그에 따른 원폭의 결과는 뼈아픈 것이었다.  

 김태환씨는 또 한가지 안타까운 일은 루즈벨트 대통령이 4선 취임 직후인 1945년 4월12일 급서하는 바람에 '준비되지 않은' 부통령 해리 트루먼이 대통령을 승계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트루먼은 정치적인 선택으로 루즈벨트의 러닝메이트가 되어 부통령까지 되었지만 통치력이 검증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부통령 취임 88일만에 대통령직을 승계하고 처음 브리핑받은 것이 원자탄 개발에 관한 '맨해튼 프로젝트'였다. 하루 아침에 세계 최강국의 대권을 쥐게 된 그는 목소리를 크게 내는 참모들에게 귀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명성의 루즈벨트에 견줘 뭔가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루즈벨트의 전후 구상과는 멀어지는 결정을 하게 됐다. 첫번째 대외 정책 시험대는 포츠담 회담(7월17일∼8월2일)이었는데 이 기간 중 제1차 핵실험이 뉴멕시코 사막에서 성공을 거뒀다는 낭보에 트루먼은 행복한 고민을 했다. 소련 게오르기 주코프 사령관의 회고록에 의하면, '회담 중의 어느날 저녁에 동석했을 때 스탈린이 외상 몰로토프에게 트루먼이 신무기 얘기를 꺼냈다. 나는 그들이 원자탄 연구에 대해 얘기하는 줄 금방 알아차렸다. 1945년 8월6일과 9일 미국은 아무 군사적 필요성이 없는데도 불구, 평화롭고 인구가 조밀한 두 도시(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투하했는데 이는 미국이 '냉전'에서 힘을 바탕으로 제국주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원자탄을 사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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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기술한대로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일이 8월9일(모스크바 시간)로 다가오는 가운데 소련의 참전을 막고 싶었던 트루먼과 강경파들은 아이젠하워 장군 등 고위 장성들이 ‘곧 일본이 항복할텐데 왜 원폭을 쓰는가'라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8월6일 히로시마에 핵폭탄 '리틀보이'를 투하했다.

 트루먼 대통령과 제임스 번즈 국무장관은 원자탄을 투하하면 일본이 깜짝 놀라 항복할 줄로 생각했지만 일본은 원자탄의 실체를 잘 몰랐기 때문에 사태 파악이 즉각 되지 않았다. 김태환씨에 따르면 "그 당시 미군기(B-29)들은 일본의 주요 도시를 융단폭격하여 무수한 민간인 희생자를 발생시켜, 도시 주민들이 시골로 미군 폭격을 피해 피난가는 소위 '소카이(疏開)'가 유행했다. 1945년 3월9일과 10일 도쿄에 대한 야간 화염 공격으로 하루 밤사이에 1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그때까지 일본 본토에서 약 100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원자폭탄을 맞고도 또하나의 강력한 융단폭격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마침내 소련은 8월8일 밤 모스크바에서 몰로토프 외상이 사토 나오다케(佐藤尚武) 일본 대사를 호출,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지 않았으므로 연합국의 요청에 의해 자정을 기해 소련과 일본은 전쟁 관계에 돌입한다고 통보했다.

 소련은 대독 전쟁의 영웅인 말리노프스키 장군을 최고 사령관으로 하는 150만 대군을 만주의 서, 동, 북 3개 방면에서 동시에 공격해 약 1주만에 60만이 넘는 관동군을 포로로 만들었고, 관동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나진, 청진 등 3곳에 육전대가 상륙했으며 개성 북방 38선까지 진격했다.

 소련이 참전한 상황에서 나가사키 원폭은 뉴욕 타임스의 지적대로, 전혀 불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급해진 미국은 소련에 시위라도 하듯 '뚱보(Fat Man)'라는 이름의 더욱 강력한 원자탄을 나가사키에 투하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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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두 개의 원폭은 일본에 끌려온 무고한 조선인 3만 명을 포함, 25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평생토록 고통을 받았고 심지어 자손들까지 유전병의 천형을 짊어지게 된 것이다.

 뉴욕 타임스는 지난 8일 미국 정부가 언론 통제로 원폭 참상을 은폐하고 원폭 투하의 명분도 뒤늦게 만들었다고 폭로한 바 있다. "원자탄 투하의 비판 여론을 막기 위해 미국의 지도자들은 '원폭이 전쟁을 끝나게 했으며 일본의 공격을 사전 차단해 100만 명을 살릴 수 있었다'는 논리를 세웠고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이 같은 주장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원폭보다도 소련군의 일본 열도 진주를 두려워한 일본은 문구 조율을 포기하고 마침내 8월15일 히로히토 일왕이 소위 '옥음방송(玉音放送)'을 통해 무조건 항복선언을 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민족에게 또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이 은밀히 진행됐다. 두 명의 미군 대령이 38선을 30분만에 그어버린 것이다. 김태환 씨의 말이다.

 "미국은 소련군의 진격 속도가 너무 빨라서 그냥 두면 한반도를 모두 수중에 넣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로 전쟁부(War Department) 작전국 전략정책단 정책과의 딘 러스크 대령에게 소련이 수락할 수 있는 한반도 분할선을 30분 안에 마련해서 올리라는 하명을 내렸다. 러스크가 벽에 걸린 내셔날 지오그래픽 지도를 보며 골똘히 생각한 끝에 서울을 포함하고 인천도 들어가는 38선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올렸더니 그대로 채택되고 소련도 동의해서 운명의 38선이 그어졌다. 당시 정책과장 보스틸 대령은 후에 대장이 되어 유엔군 사령관으로 한국에서 근무했고, 과장보였던 러스크 대령은 전역하여 국무부에 근무하다가 장관까지 되었다. 남북 분단의 원인 제공도, 38선을 그은 것도, 신탁통치의 기획도 미국이었다는 불편한 진실을 우리는 마주 하고 있다."

 김태환씨는 경기고와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하고 서울대대학원 외교학과 1년 수료 후 코리아헤럴드 기자, 남북회담 사무국 외신담당관을 역임했다. 1970년대 평양서 열린 적십자사 대표단의 일원이었던 그는 도미 후 미 육군에서 컴퓨터 오퍼레이터로 근무했고 파예트빌스테이트 대학(회계학)과 하버드 비즈니스스쿨(MBA)을 졸업했다. 현재 한국전쟁을 중심으로 한 현대사료 연구가 및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남가주한인하버드동창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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