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의 페르소나' 몬테카를로 수석 안재용, '망각' 무대
샛별 박윤재, 15분 독무 '볼레로' 첫 도전…박수 갈채
발레 '에세', 25~26일 노원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25일 서울 노원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열린 '제1회 노원발레페스티벌'에서 컨템포러리 발레 '에세(Essai)' 중 '망각' 무대가 펼쳐졌다.
프랑스어로 '시도하다'라는 뜻인 에세는 영어 에세이(Essay·수필)의 어원이다. 1580년 프랑스 철학자 미셸 드 몽테뉴가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엮은 책 제목을 '수상록(Essais)'이라 지은 데서 기원한 이 제목처럼, 무대는 안무가의 뼈아픈 과거를 일기장처럼 써내려간 고백이었다.
파리오페라발레 동양인 남성 최초 솔리스트 출신으로 최근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직을 내려놓은 김용걸(52) 총예술감독이 안무한 '망각'은 그의 자전적 작품이다.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를 거쳐 해외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입상하며 승승장구하던 그가 2000년 파리오페라발레단에 인턴으로 입단한 직후 겪은 극심한 슬럼프를 담았다.
김용걸 예술감독은 "파리로 떠나기 전 내 자만감은 하늘을 찔렀지만, 입단 직후 5개월은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 대타(언더스터디) 신세였다"며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는 자괴감 속에, 좁은 방 안에서 끊임없이 나를 짓누르던 절망적인 기억을 무대 위로 꺼냈다"고 털어놨다.
그의 26년 전 기억은 모나코 몬테카를로 왕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안재용의 몸짓을 통해 무대 위에 다시 구현됐다. 세계적인 현대 발레 거장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몬테카를로 발레단 예술감독)의 페르소나로 불리는 그가 온전히 김용걸의 페르소나로 분한 순간이다.
막스 리히터의 'On the Nature of Daylight'(햇빛의 본질에 관하여)의 묵직한 선율 위로 알 수 없는 압박감에 짓눌린 듯 심호흡하며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보이지 않는 존재'에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거듭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뒤틀린 동작은 처절한 무력감을 드러냈다.
김다운과의 파드되는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파트너이자 또 다른 자아처럼 보이는 김다운과의 춤은 스스로에게 갇혀 무너져가는 인간의 내면을 떠올리게 했다.
이날 공연은 다채로운 단편 레퍼토리로 채워졌다. 백조와 흑조가 상징하는 흑백의 선입관을 꼬집은 최솔지의 '편견'을 시작으로, 드레스덴 젬퍼오퍼 발레단 출신 박소연이 안무하고 이은수와 함께 경쾌하게 대결하듯 풀어낸 2인무 '헝가리안 랩소디'가 눈길을 끌었다.
프랑스 철학자 알베르 카뮈의 소설에서 영감을 얻어 다수의 도덕적 폭력을 비판한 4인무 '이방인'(최솔지·이지희·김하경·김민경),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초연 당시의 야유를 모티브로 원치 않는 제물이 된 자의 시선을 담은 솔로 무대 '제물'(이지희)도 이어졌다.
2014년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기리며 산 자와 죽은 자를 위로하는 진혼곡 성격의 2인무 '별'(이은수·김민경)은 객석에 묵직한 울림을 남겼다. 두 무용수는 여학생의 손을 남학생이 잡아주는 장면을 춤으로 그려냈다. 감정의 과잉을 덜어낸 절제된 '살풀이'의 정서로 상실의 비극을 형상화했다.
막스 리히터의 'The Departure(작별)'에 맞춰 박윤재(ABT 스튜디오 컴퍼니 단원·17)와 김하은(ABT 스튜디오 컴퍼니 입단 예정·16)이 호흡을 맞춘 무대도 인상적이었다. 젊은 남녀의 만남과 사랑, 헤어짐을 그린 'On the way to…'에서 두 사람은 10대답지 않은 성숙한 연기력을 보여줬다.
공연의 대미는 15분간 쉼 없이 몰아치는 박윤재의 '볼레로' 솔로 무대가 장식했다. 붉은 조명이 강하게 사용돼 '블러드(Blood)'라는 부제가 붙었다.
김용걸 안무가는 공연 전 해설에서 "신작 '볼레로'는 원래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안재용 수석무용수에게 제안하려 했으나 일정이 맞지 않아 불발됐다"면서 "대신 호기심이 많고 끈기 있게 도전을 수락한 박윤재 덕분에 작품이 완성됐다"고 말했다.
'볼레로' 첫 무대에 선 박윤재는 몸에 밀착되는 전신 타이즈 형태의 유니타드를 입고 등장했다. 한때 굵은 다리를 콤플렉스로 여겼던 박윤재에게 오히려 단단하게 발달한 하체는 '볼레로'의 강렬한 움직임을 밀어붙이는 힘이 됐다.
붉은 조명 아래 탄탄한 근육질의 몸이 빚어내는 역동적인 움직임은 단숨에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큰 키를 활용한 회전과 점프로 폭발적인 에너지를 뿜어내면서도 15분간 한순간도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관능적이고 과감한 움직임에서는 이전의 소년티와 다른 성숙미도 드러났다. 박윤재가 온몸으로 밀어붙인 '볼레로'가 끝나자 객석에서는 뜨거운 환호와 갈채가 터져 나왔다.
김용걸 안무의 '에세'는 26일까지 노원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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