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례적 수치 특정…韓 국방은 "80~120개"
민간 추정엔 부합…실제 기밀정보일 수도
'北 비핵화' 美원칙, '핵 동결'로 전환 우려
[서울=뉴시스] 김승민 기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연내 회담 의지를 드러내며 북한 핵무기 규모를 직접 언급했다. 북한 비핵화를 위한 대화 시도인지를 묻는 질문에는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김 위원장이 내건 대화 재개 조건이 핵보유국 지위 인정이라는 점에서, 미국이 북한 핵개발 의혹 제기 이후 유지해온 '비핵화' 원칙을 사실상 포기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다시 제기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19일(현지 시간)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김정은은 매우 강력한 핵무기 57기를 보유하고 있다"며 "내가 대통령이었다면 허용하지 않았겠지만, 그는 핵무기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외신을 종합하면 미국이 정부 차원에서 북한의 핵무기 보유량을 공식적으로 특정한 것은 다소 이례적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미국 육군이 2020년 7월 발간한 보고서는 북한의 핵무기 보유량을 '20~60기'로 매우 폭넓게 언급하고 있다.
안규백 국방부 장관도 20일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정확한 수치를 말하기는 상당히 제한적"이라며 "80~120개 정도로 보고 있다"고만 말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날 트럼프 대통령 발언에 대해 "과거 미국 정부가 유지해온 입장과 달리 매우 구체적인 수치"라고 짚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57기'가 미국 정보당국의 실제 결론인지 여부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복수의 서방 연구기관이 추정한 범주에는 부합하는 수치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지난 6월 "북한은 핵탄두 약 60기를 조립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최소 30기를 추가 생산할 수 있는 핵물질을 보유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미 의회조사국(CRS)이 지난해 민간 기관 자료를 종합해 발표한 보고서는 "북한이 핵탄두 최대 90기를 만들 수 있는 핵물질을 생산했고, 조립된 탄두는 50여기일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이다.
영국 가디언은 이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이 통상적으로 일반에 공개하지 않는 정보를 노출했을 수 있다"며 실제 대북 기밀 정보를 공개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일각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또다시 북한 비핵화 포기를 시사했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북한 핵무기 수량을 언급한 뒤 '북한 비핵화를 위해 대화를 재개하는 것인가' 질문에 "그것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다. 나는 김정은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며 사실상 답을 거부했다.
이를 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핵 동결 및 핵무기 제한 등 군축 협상에 가까운 접근을 예고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그러면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고도화 저지 등 미국 본토 안보 위협을 낮추는 데 주력하는 쪽으로 전략 기조를 틀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2024년 1만5000㎞급 ICBM 화성-19형을 발사하는 등 핵·미사일 역량을 크게 끌어올린 상황이다. 다만 미국 본토 정밀 타격 능력을 완성하지는 못한 상태라는 분석이 많다.
일단 트럼프 행정부는 공식적으로는 북한 비핵화라는 미국의 기존 전략을 유지하고 있다.
백악관은 5월 14~15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 종료 후 발표한 팩트시트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은 북한 비핵화라는 공동 목표를 재확인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과 시 주석이 2017년 11월 미중 정상회담에서 발표하고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이 2023년 11월 미중 회담에서 시 주석과 재확인한 한반도 비핵화 추진 의지를 다시 내세운 것이다.
미국 주도 안보 협의체 쿼드(Quad, 미국·인도·호주·일본)는 5월26일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외무장관회의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라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우리의 의지를 재확인하고, 북한이 관련 안보리 결의에 따른 모든 의무를 준수할 것을 촉구한다"고 재차 언급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사실상 핵 보유를 용인하고 있다는 지적은 지속적으로 제기돼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월20일 취임식 당일 김 위원장을 언급하며 '핵보유국(nuclear power)'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파장을 불렀다. 당시에는 '핵보유 인정이 아닌 객관적인 상황 표현'이라는 선에서 일단락됐다.
그러나 지난해 10월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 전 "나는 그들이 일종의 핵보유국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논쟁에 다시 불이 붙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경주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김 위원장과의 회동을 타진하고 있었는데, 김 위원장이 내세운 대화 재개 조건인 '핵보유국 인정'을 고려한 뼈 있는 언급이라는 해석이 나오면서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9월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미국이 허황한 비핵화 집념을 털어버리고 현실을 인정한데 기초하여 우리와의 진정한 평화공존을 바란다면 우리도 미국과 마주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지난 2월 제9차 당대회에서도 "만일 미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에 명기된 우리 국가의 현 지위를 존중하며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철회한다면 우리도 미국과 좋게 지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북한은 한미 연합연습 을지 자유의 방패(UFS) 전격 축소를 평가절하하면서도, 북미 정상회담 재개 가능성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며 트럼프 대통령 발언을 주시하는 기류다.
김여정 노동당 총무부장은 19일 '주요 국제문제들에 대한 입장 발표'에서 UFS 조기 종료에 대해 "미국 측이 이번에 취한 자기들의 조치를 그 무슨 '선의의 조치'로 선전해 보려고 타산한다면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소통 여부에 대해서는 "내가 알지 못하는 유일한 사안"이라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우리 국가수반이 트럼프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좋은 추억과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데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 밝힌 바 있다. 두 지도자들의 관계는 의연 훌륭하다"고 강조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2018년 6월 싱가포르,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 2019년 6월 판문점에서 세 차례 만났으나 성과 없이 헤어졌다. 이후 북한은 화성-18·19형 등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ICBM을 시험 발사했고, 미국 정부 추정에 따르면 핵무기는 연 6기 안팎으로 늘려온 것으로 보인다.
WP는 "두 정상은 트럼프 대통령 첫 임기 동안 세 차례 만났으나 핵 제한 합의는 없었고, 핵무기는 회담 이후 크게 증가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지적했다. 크레이그 싱글턴 민주주의수호재단(FDD) 선임연구원은 "김정은이 자신의 핵무기를 협상 카드로 내놓을 의향이 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고 했다.
나아가 미국이 북한 핵 보유를 사실상 인정할 경우, 북한 비핵화를 전제로 미국 확장억제에 의존해온 한국과 일본이 자체 핵무장을 검토하는 새로운 국면이 열릴 가능성도 있다. 다만 안규백 장관은 이날 국방위에서 "우리는 핵을 개발할 수 없다. 미국 핵우산 제공을 확실하게 받는 정책으로 일관되게 나가는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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