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득찐득함을 건너간 그림…강요배 '소소, 반색'[박현주 아트에세이 ㉛]

기사등록 2026/08/15 00:01:00 최종수정 2026/08/15 00:12:24
여름 풍경을 그린 강요배 '녹음'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그림을 그린다는 건
무엇일까.

강요배는 말했다.

“자기가 모르는 자기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낚시와 같다고 했다.

낚싯줄을 드리우지만
무엇이 올라올지는 모른다.

기다리고,
바라보고,
마음에 오래 담아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무언가 걸린다.

내가 그리려 했던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지만
나도 몰랐던 것.

마음 한 조각이다.

강요배_영등바람, 2026, Acrylic on canvas, 194x259cm *재판매 및 DB 금지


강요배의 그림에는
바람이 많다.

바람은 보이지 않는다.

나무가 흔들리고
파도가 일고
구름이 밀려가는 것을 보고서야
바람이 지나갔음을 안다.

마음도 그렇다.

보이지 않지만
무언가 흔들린 뒤에야
그곳에 마음이 있었음을 안다.

그래서 그는
눈앞의 것을 그대로 그리지 않는다.

“따라 그리면
대상의 종이 되는 것 같아요.”

보고,
잊고,
생각하고,

마침내
자기 마음대로 그린다.

물을 섞은 물감은 흘러가고
얼룩은 번지고
우연이 끼어든다.

화가도
그 끝을 모른다.

젊은 날의 강요배는
제주 4·3을 그렸다.

그 무거운 시간을 지나
제주로 돌아온 뒤에는
바다와 바람,
나무와 풀을 그렸다.

그리고 일흔넷의 그는
'소소, 반색'으로 돌아왔다.

마당의 새와 고양이,
나무에 매달린 열매 한 알.

작고 사소해서
지나치기 쉬운 것들을
반갑게 바라본다.
강요배_해바라기-쿠르스크, 2025, Acrylic on canvas, 162x130.3cm *재판매 및 DB 금지


그러나 그의 시선은
제주에만 머물지 않는다.

우크라이나 전쟁터의
말라버린 해바라기가
화면에 서 있다.

제주에서 세계로.

그러나 어쩌면
그가 바라보는 것은
오래전부터 같은 것인지 모른다.

사라지는 것.

견디는 것.

그래도
다시 살아가는 것.

그의 붓도 달라졌다.

“옛날에는 찐득찐득했는데
지금은 설렁설렁해요.”

어떤 나무는
20분 만에 그렸다.

오래 보고
짧게 그린다.

많이 생각하고
적게 남긴다.

20분 만에 그린 그림. 강요배 '나무'.학고재 전시 전경.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강요배, 비천(飛天) Flying in the Sky, 2022, 캔버스에 아크릴릭 Acrylic on canvas, 227x182cm


그는 예전에
그림이란 군더더기를 버리고
본질을 끄집어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제
고희를 지난 화가는 말한다.

“그렇게까지
무거울 필요가 있나 싶어요.”

가벼움은
가벼운 사람의 것이 아니다.

충분히 무거워본 사람이
마침내 내려놓을 때
얻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나를 더 잘 알게 될 거라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내 뒤통수를
내가 볼 수 없듯,

평생 함께 살아온 마음에도
보이지 않는 곳이 있다.

강요배는 말했다.

“내가 모르던 걸 봐주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가 되는 거죠.”

그림도
그런 친구인지 모른다.

말없이
내 뒤통수를 바라봐주는 것.

강요배_혹등아귀, 2025, Acrylic on canvas, 116.7x91cm *재판매 및 DB 금지


내가 미처 몰랐던 나를
슬쩍 보여주는 것.

그러니 그림 앞에서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마음이 움직였다면
이미 무언가 걸린 것이다.

화가는
자연에 낚싯줄을 드리운다.

관객은
그림에 낚싯줄을 드리운다.

그리고 가끔,

생각지도 못했던
내 마음 하나가
딸려 올라온다.

그림은
세상을 그리는 일이 아니라

어쩌면

세상을 바라보다
나를 발견하는 일이다.


◎공감언론 뉴시스 hyun@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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