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AI발 메모리 쇼티지에 中 칩 사용까지 검토 시사
마이크론은 "빅테크 저가 압박이 공급난 불렀다" 반격
가격 인상·반독점 소송·美 정치권까지 번진 메모리 전쟁
반대편에서는 미국 유일의 대형 메모리 기업인 마이크론이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과거 불황기에 빅테크가 부품값을 지나치게 눌러 공급사들의 투자를 막아놓고, 이제 와서 가격 인상 책임을 메모리업계에 돌리고 있다는 주장이다.
양측의 신경전은 단순한 단가 협상을 넘어 중국 공급망, 미국 정치권, 반독점 소송까지 끌어들이는 전면전으로 번지고 있다.
◆가격 올린 애플, 中 메모리 카드까지 꺼내…공급사 압박일까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메모리와 저장장치 가격 상승이 더 이상 감내하기 어려운 수준이 됐다며 제품 가격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AI 서버용 초고속 메모리(HBM)에 반도체 생산 라인이 집중되면서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용 메모리 공급이 줄었고, 이 틈을 타 메모리업체들이 가격을 크게 올렸다는 주장이다.
애플은 이미 맥북과 아이패드 등 일부 제품 가격을 국내 기준으로 수십만 원 가량 올렸다. 하반기 출시될 아이폰 신제품 가격에도 메모리 비용 상승분이 반영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그동안 애플은 막대한 구매력을 바탕으로 부품 가격 변동을 흡수해왔지만, 이번에는 공급 부족의 강도가 이전과 다르다.
애플이 중국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스(CXMT) 칩 사용을 위해 미국 정부와 접촉하고 있다는 외신 보도도 같은 맥락이다. CXMT는 중국의 대표 D램 기업이지만 미국 안보 당국의 감시 대상에 올라 있다. 거래 자체가 불법은 아니더라도 미국 정치권의 반발과 규제 리스크를 피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애플이 중국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것은 기존 메모리 공급사를 압박하기 위한 신호로 풀이된다.
마이크론은 물러서지 않고 있다. 수밋 사다나 마이크론 최고사업책임자(CBO)는 최근 일부 대형 고객들이 2023년 메모리 불황기 당시 지나치게 낮은 가격을 요구했고, 그 결과 공급업체들이 충분한 설비 투자를 하지 못했다는 취지로 밝혔다. 애플을 직접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업계에서는 사실상 애플 등 빅테크를 겨냥한 발언으로 받아들인다.
산제이 메흐로트라 마이크론 CEO도 공급 부족이 단기간에 해소되기 어렵다는 입장을 강조한다. 메모리 가격 폭락기에는 공급사들이 손실을 감수하며 생산과 투자를 줄일 수밖에 없었고, 이후 AI 수요가 폭발하면서 공급 확대 속도가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는 논리다.
특히 메호르트라 CEO는 최근 인터뷰에서 "일부 고객들이 메모리 가격을 지나치게 낮췄었다. 2023년에는 메모리 가격이 기존 대비 3분의 1 수준까지 떨어졌다"고 강조했다. 마이크론 입장에서는 지금의 가격 상승이 폭리가 아니라 과거 투자 공백과 AI 수요 급증이 만든 시장 정상화라는 점을 부각할 필요가 있다. 반대로 애플은 소비자 가격 인상 책임이 메모리 3사의 가격 정책에 있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부품값 공방이 여론전으로 번지는 이유다.
◆미·중 프레임 번진 싸움…정치권 줄대기 경쟁
갈등은 미국 정치권으로도 확산되고 있다. 애플이 중국 메모리 사용 가능성을 타진하는 동안, 마이크론은 미국 내 반도체 생태계와의 결속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마이크론은 최근 미국의 아동 장기저축 계좌 제도인 '트럼프 계좌(Trump Accounts)'에 최대 2억5000만 달러를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직원 자녀에 대한 매칭 지원과 사업장 소재 지역 아동 대상 초기 지원금 등이 포함된 계획이다.
미국 유일의 대형 메모리 기업이 대통령의 이름을 달고 미국 정부가 추진하는 530A 계좌 프로그램에 대해 기여하겠다고 나선 셈이다.
시점은 미묘하다. 애플이 중국산 메모리 사용 허가를 모색한다는 보도가 나온 직후 마이크론은 미국 내 제조·일자리·미래 인재 투자를 강조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미국 메모리 기업 대 중국 공급망을 활용하려는 빅테크라는 정치적 프레임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
◆폰값·게임기값 줄인상…AI가 바꾼 공급망 권력
빅테크 간 메모리 가격 전쟁의 불똥은 결국 소비자에게 튀고 있다. 직접 반도체 불황을 이유로 댄 애플 외에도 대다수의 IT 제조업체들이 가격을 높이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이미 상반기 갤럭시 S26 시리즈의 출고가를 9만9000원 올린 데 이어 하반기 플래그십 폰의 가격 인상도 유력하다. 소니 '플레이스테이션(PS)5', 마이크로소프트(MS) '엑스박스 시리즈 X|S', 닌텐도 '스위치2'까지 현존하는 대표적인 게임기 3종의 가격도 모두 수십달러에서 100달러 이상 올랐다. 노트북과 태블릿 PC 등의 가격 인상 압력도 갈수록 커지는 분위기다.
이 와중에 미국에서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을 상대로 한 반독점 집단소송도 제기됐다. 소비자와 소규모 PC 사업자들은 메모리 3사가 D램 생산을 조율해 공급을 제한했고, 그 결과 애플 기기 등을 포함한 전자제품 가격이 올랐다고 주장하고 있다. 애플은 피고가 아니지만 메모리 가격 상승이 소비자 제품 가격으로 전이됐다는 점에서 소송의 핵심 사례로 거론되고 있다.
물론 가격 상승만으로 담합이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메모리업체들은 AI 수요 급증, HBM 전환, 과거 불황기 투자 축소, 장기 공급계약 증가 등 시장 요인에 따른 결과라고 반박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이번 사태는 메모리가 다시 전략자산으로 부상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과거 애플은 부품 공급망을 쥐고 흔드는 절대 강자였지만, AI 시대에는 메모리업체들도 더 이상 낮은 단가를 받아들이기만 하는 하청업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애플은 중국 칩이라는 위험한 지렛대를 꺼내 들었고, 마이크론은 미국 정치권과 장기계약을 방패로 세우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AI가 메모리 수요의 우선순위를 바꾸면서 IT업계의 권력지도가 다시 그려지고 있다"며 "이번 가격 전쟁이 애플 제품값 인상에 그치지 않고 향후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방향을 가늠할 시험대가 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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