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최신 AI 제한·희토류 차질까지 독일 제조업 압박
WSJ "세계화 수혜국 독일, 대외 의존이 취약성으로 바뀌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7일(현지시간) 독일 경제가 오랫동안 수출과 글로벌 공급망에 기대 성장했지만, 미국·중국의 정책 변화와 전쟁에 따른 에너지 가격 충격에 취약한 구조가 됐다고 보도했다.
독일은 자동차, 기계, 의료장비, 산업용 장비를 세계 시장에 팔며 약 20년 동안 안정적 성장을 이어갔다. 그러나 중국 기업들이 독일 제품에 근접한 품질을 더 낮은 가격에 내놓으면서 독일 제조업의 수출 입지는 빠르게 좁아지고 있다.
중국산 제품은 유럽 시장으로 밀려들고 있을 뿐 아니라 제3국 시장에서도 독일 기업의 입지를 좁히고 있다. 독일의 최대 고객 중 하나였던 중국이 이제는 독일 제조업의 직접 경쟁자가 된 셈이다.
미국 정부의 기술 통제도 독일과 유럽 기업에 부담이 됐다. 미국은 이달 초 국가안보를 이유로 생성형 AI ‘클로드’를 개발한 앤트로픽의 최신 대형 언어모델 해외 제공을 제한했다. 이 조치로 유럽 기업들은 최신 AI 모델을 활용하는 경쟁에서 미국 기업보다 불리한 위치에 놓였다.
이번 앤트로픽 모델 제한은 유럽의 대외 의존이 희토류 같은 원자재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도 드러냈다. 유럽 기업들은 AI 응용 서비스 개발에는 강점을 보이고 있지만, 기초 모델과 컴퓨팅 인프라 대부분은 미국 기업에 의존하고 있다.
독일 국책개발은행 KfW의 디르크 슈마허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독일이 세계화의 수혜자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무역과 공급망 의존이 상대국의 압박 수단으로 쓰이는 환경에서는 대외 의존도가 높은 나라일수록 더 쉽게 흔들릴 수 있다고 짚었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 정부는 기업 세금 감면, 에너지 가격 인하, 국방·인프라 지출 확대 등으로 경기 회복을 유도하고 있다. 고령화와 노동력 부족에 대응하기 위해 은퇴연령을 현행 67세에서 70세로 단계적으로 높이는 방안도 내놨다.
하지만 이런 처방은 아직 성장률과 일자리 지표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독일 정부와 주요 경제학자들은 올해 독일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1% 이하에 머물 것으로 보고 있다. 독일의 투자도 2020년 이후 줄었고, 제조업 종사자는 660만명으로 줄어 10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외부 충격은 독일 정부가 추진하던 내정 개혁의 순서까지 바꿔놓고 있다. 이란 전쟁이 터지자 독일 정부는 재정 부담이 커진 복지제도 개편 작업을 뒤로 미루고 통근자 연료비 보조 대책을 먼저 마련해야 했다. 복지개혁안은 당초 계획보다 크게 축소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당시와 다르다는 지적이 나온다. 독일 제조업이 가격 경쟁력을 일부 회복하더라도, 과거처럼 중국과 세계 시장이 독일 제품을 대규모로 사들이는 환경이 더는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첫 번째 중국 충격은 값싼 중국산 제품이 세계 제조업을 흔든 현상을 뜻한다. 독일경제연구소의 미하엘 휘터 소장은 이번에는 중국이 자동차·기계 같은 고급 제조업까지 압박하는 ‘두 번째 중국 충격’이 닥쳤다고 설명했다.
독일 기업들은 복잡한 행정 절차와 경직된 노동 규제도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말한다. 독일 정부는 일부 규제 완화에 나섰지만, 기업들이 요구하는 고용·해고 규제 완화에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독일이 핵심 원자재 공급망을 다변화하고, 투자 자금이 스타트업으로 더 쉽게 흘러가도록 자본시장을 손봐야 한다고 조언한다. AI도 이제 일부 산업의 보조 도구가 아니라 경제 전반을 좌우할 기반 기술인 만큼, 유럽이 자체 AI 개발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다만 독일 기업들이 여전히 중국산 부품과 원료에 크게 의존하고 있어 중국의 보복을 우려해 강한 대응에 나서기도 쉽지 않다. 슈마허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산업 회복력을 키우는 데 시간이 걸릴수록 독일이 제조업 기술력과 고부가가치 생산 기반을 잃을 위험이 커진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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