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과의 영화관 동행기
키오스크·이어폰 단자도 장벽
'왕사남'은 폐쇄형 자막도 없어
[서울=뉴시스]신유림 기자 = "키오스크 있나요? 어디 있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저시력 시각장애인 유용섭씨는 한동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기자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곳엔 키오스크 네 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중 한 대에는 '장애인·고령자 키오스크'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지만, 저시력인 유씨 눈에는 쉽게 들어오지 않았다. 키오스크 위치를 알려주는 유도블록이나 점형블록도 보이지 않았다.
지난 21일 오후 서울 성북구의 한 영화관에서 유씨는 오래된 유선 이어폰을 꺼냈다. 시각장애인용 음성 안내 기능을 이용하려면 이어폰 연결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최근 흔히 쓰는 C타입 이어폰은 키오스크에 맞지 않아, 별도로 구형 이어폰을 들고 다닌다고 했다.
이어폰을 손에 쥔 채 유씨는 키오스크 구석구석을 더듬기 시작했다. 화면 아래와 카드 투입구 주변, 기기 옆면까지 손끝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보통은 점자로 단자 위치를 적어두는데…여긴 없네요."
이어폰 단자를 찾는 데만 2분 가까이 걸렸다. 이어폰을 연결하자 음성 안내가 흘러나왔다. 유씨는 화면 설명을 하나씩 들으며 키패드 위치를 익혀 버튼을 눌렀다.
이어폰을 꽂고 예매창까지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10분이었다. 비장애인이 1분 남짓이면 끝낼 일을, 시각장애인은 10분 가까운 시간을 들여야 했다.
정부는 최근 영화 산업 활성화를 위해 할인권 225만장을 배포하며 '극장가 봄날'을 예고했지만, 시각장애인에게 영화관의 문턱은 여전히 높았다. 예매부터 관람까지의 과정은 시각장애인에게 커다란 장벽이었다.
예매를 마친 뒤에도 난관은 이어졌다. 영화관 내부 에스컬레이터는 시각장애인에게 위험천만했다. 극장이 무인화되면서 직원은 매점에만 머물렀고, 도움이 필요해도 즉시 요청하기 어려웠다.
유씨는 "혼자 와서 영화를 보고 갈 사람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될까 싶다"며 "결국 누군가와 동행하거나 직원을 호출하는 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씁쓸하게 웃었다.
가까스로 상영관에 발을 들여도 장벽은 계속됐다. 시각장애인이 영화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선 '화면 해설'(AD) 서비스가 필수적이지만 이날 상영작 가운데 해당 서비스를 제공하는 영화는 없었다.
현재 영화진흥위원회는 한국농아인협회,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와 함께 시각·청각장애인을 위한 배리어프리 영화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영화관 전체 스피커로 화면 해설이 나오는 '개방형', 개인 이어폰으로 들을 수 있는 '폐쇄형' 방식이다.
폐쇄형은 전용 애플리케이션 '싱크로’를 통해 제공된다. 영화를 틀고 앱을 켜면 영화 음성을 스스로 인식해 대사 사이사이에 "누군가 웃는다", "차가 골목으로 들어간다" 같은 장면 설명을 들려준다.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영화관 전체 스피커로 해설이 나오는 '개방형'보다, 개인 이어폰으로만 들을 수 있는 '폐쇄형' 서비스가 훨씬 선호된다. 주변 소음에 방해받지 않고 영화에 집중할 수 있어서다.
그러나 폐쇄형으로 제공되는 상업영화는 많지 않다. 최근 1600만 관객을 모은 인기작 '왕과 사는 남자'(장항준 감독) 역시 폐쇄형 자막은 없었다.
유씨는 결국 "왕사남을 보러 갔다가 소리만 듣고 왔다"고 했다.
"너무 보고 싶었는데 폐쇄형 해설이 없었어요. 모든 영화를 다 바라는 건 아녜요. 그래도 천만 영화 정도는 빨리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실제로 이날 유씨가 보여준 싱크로 앱에는 단편·독립영화나 개봉한 지 오래된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올해 개봉작 가운데선 영화 '휴민트'(류승완 감독)만 올라와 있었다.
관계자들은 예산 부족을 이유로 들었다. 한국농아인협회 관계자는 "영화 한 편을 싱크로 앱에 탑재하는 데만 300만원 넘는 비용이 들어 예산상 모든 영화를 올리기 어렵다"며 "'왕사남'은 전국 상영회 형태의 개방형으로 제공됐으며, 현재로선 폐쇄형 탑재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관계자 역시 "최근 가치봄 사업이 지연되고 있어, 5월에도 제작을 못 한 상태"라고 전했다.
성북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는 유씨는 여전히 우리 사회가 배리어프리와는 거리가 있다고 말했다.
유씨는 "키오스크 기기마다 구조와 화면 구성이 전부 달라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며 "최소한 키패드 위치나, 크기, 화면 구성 정도는 규격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배리어프리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이유로 멈추기보단, 필요한 사람들이 계속 이용할 수 있도록 더 세심한 지원이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공감언론 뉴시스 spicy@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