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살아남았다"…강남역 살인사건 10주기 추모집회

기사등록 2026/05/17 15:54:59 최종수정 2026/05/17 16:29:59

"성차별이 재난 본질"…157개 여성단체 강남역 집회

"10년간 여성 피해 2951명"…정부에 대책 요구

[서울=뉴시스]최은수 기자=17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앞 도로에서 열린 강남역 여성살인사건 10주기 추모행동 참가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집회에 참석하고 있다. 참가자들은 "강남역 10주기! 추모를 딛고 행동하라" 등의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었다.2026.05.17. eschoi@newsis.com

[서울=뉴시스]최은수 기자 = "강남역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살아남은 우리가 세상을 바꾼다"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10주기를 맞은 17일 오후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10번 출구 앞. 검은 옷과 마스크, 선글라스를 착용한 참가자들이 도로 위에서 구호를 외쳤다.

2016년 5월17일 강남역 인근 상가 건물 공용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살해당했다. 가해자인 30대 남성은 화장실에서 남성 6명을 그냥 보낸 뒤 여성을 기다렸다 범행을 저질렀으며, 살인 동기에 대해 "평소 여자들이 무시해서"라고 진술했다.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 여성혐오 논란을 촉발했다. 당시 경찰이 해당 사건을 여성혐오가 아닌 '정신질환에 의한 묻지마 범죄'로 결론 내리자, 이에 반발하며 구조적 성차별 해소를 요구하는 추모와 규탄 시위가 강남역 10번 출구를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확산했다.

이날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10주기 추모행동' 현장에는 젠더폭력해결페미니스트연대 등 157개 여성시민단체와 주최 측 추산 약 500명의 시민이 집결했다. 참가자들은 '강남역 다시! 각성 결집! 행동하라!'가 적힌 검은 티셔츠와 모자를 쓰고 강남역 10번 출구 옆 1개 차로를 점거한 채 집회를 이어갔다.

강남역 10번 출구 벽면에는 '살아남은 우리가 세상을 바꾼다'는 피켓 아래 추모 포스트잇이 다시 붙었다. 현장을 찾은 시민과 참가자들은 10번 출구 앞에 멈춰 서서 포스트잇을 읽거나 포스트잇을 벽면에 추가로 부착하며 피해자를 추모했다. 포스트잇에는 "나에게 강남역은 수면 위로 드러난 젠더폭력이다", "왜 더 일찍 알지 못했는지에 대한 미안함이다", "다시는 누구도 운 좋게 살아남지 않아도 되는 세상으로" 등의 문구가 담겼다.

[서울=뉴시스]최은수 기자=17일 서울 강남구 강남역 10번 출구 일대에 강남역 여성살인사건 10주기를 추모하는 시민들의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2026.05.17 eschoi@newsis.com

참가자들은 이달 초 발생한 광주 여고생 살해 사건 등 반복되는 여성폭력의 현실을 규탄했다. 이들이 든 손팻말에는 "2016년 5월 강남역 여성혐오살해, 2026년 5월 광주 여고생 살해, 반복되는 여성살해 우리가 끝내자"라는 문구가 담겼다.

박지아 서울여성회 성평등교육센터장(젠더폭력해결페미니스트연대 공동대표)은 "강남역은 한 여성이 여자라서 죽였다는 범인에게 살해된 장소이자 수많은 시민이 모여 변화를 촉구한 장소"라며 "10년 동안 신당역, 인하대, 진주, 부산, 남양주, 대구, 그리고 얼마 전 광주까지 기억해야 할 장소가 늘어났고 스토킹과 교제폭력, 딥페이크 성범죄와도 싸워야 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2026년 치안 1위라는 대한민국에서 여성들은 매일 전쟁 같은 일상을 보낸다"며 "친밀한 관계, 일터, 거리에서조차 안전하지 않은 사회를 용납하지 않고 갈 수 있는 힘은 각성과 결집, 행동뿐"이라고 강조했다.

도경은 한국여성의전화 활동가는 "2016년부터 10년간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 의해 죽거나 죽을 위험에 처한 여성은 언론 보도 집계 최소 수치로만 2951명에 달하며, 작년 한 해 동안 살인미수 등을 포함해 폭력에 노출된 여성은 389명"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신당역, 신림동, 대전, 의정부, 대구, 동탄, 울산, 광주까지 국가가 무관심과 무능력으로 실패를 반복하는 사이 사건들이 이어졌다"며 "성차별이 이 끔찍한 재난의 본질임을 인정하고 생명을 지킬 수 있는 대책을 실행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영란 목포여성의전화 공동대표 역시 "한국여성의전화 집계에 따르면 작년 한 해 동안 13시간마다 1명이 친밀한 관계에서 살해되고, 94명이 일면식도 없는 이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말했다.

민선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는 "국가는 강남역 사건을 '묻지마 범죄'라 부르며 가해자 개인의 문제로 축소하고 국가의 책임을 지우려 했다"며 "우리는 '나일 수 있었다', '우연히 살아남았다'며 저마다의 경험을 끄집어냈고 일상의 차별과 폭력이 보편적 문제임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노동 현장과 교육계의 목소리도 나왔다. 이윤희 공공운수노조 부위원장은 "일터 안전을 위협하는 젠더폭력은 산업재해이자 중대재해"라며 이재명 정부를 향해 국제노동기구(ILO) 제190호 '폭력과 괴롭힘 금지 협약' 비준을 요구했다.

김지연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부위원장은 "N번방, 딥페이크 사건 등 학교도 안전한 공간이 아니다"라며 "학내 여성혐오와 폭력에 맞서는 일은 학교 민주주의 운동"이라고 밝혔다.

참가자들은 선언문 낭독을 통해 성평등한 사회를 향한 행동을 이어갈 것을 결의했다. 행사 말미에는 강남역 10번 출구 앞 도로 위에 일제히 누워 여성폭력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여성폭력 다이인(Die-in)' 퍼포먼스를 진행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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