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개 국가관·31개 공식 병행전…전쟁·검열 논란 속 개막
이란 불참·러시아·이스라엘관 시위…황금사자상도 첫 폐지
한국관 ‘해방공간’ 일본관 관통 첫 협업…해외 매체들도 주목
최빛나 “황금사자상 폐지했는데 인기상도 재고해야”
[베니스=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노(No) 러시아’, ‘집단학살관은 물러나라(No Genocide Pavilion)’, ‘팔레스타인은 세계의 미래다(Palestine is the future of the world)’.”
이탈리아 베네치아 자르디니에서 개막한 제61회 베니스비엔날레는 미술 전시를 넘어 ‘국가’라는 시스템 자체를 되묻는 현장으로 변모했다.
전쟁과 검열, 국가와 대표성을 둘러싼 긴장 속에 열린 행사장에는 시위대와 연막탄, 팔레스타인 연대 포스터가 등장했다. 세계 미술의 올림픽이라 불리는 비엔날레는 개막 전부터 국제정치의 축소판이 된 셈이다.
총감독 고(故) 코요 쿠오의 갑작스러운 별세와 심사위원단 전원 사퇴, 국가관 황금사자상 폐지, 이란의 불참까지 겹치며 예술의 축제는 시작 전부터 논쟁의 장이었다.
현장에는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중단됐던 러시아관은 올해 제한적으로 다시 문을 열었지만 거센 반발과 시위가 이어졌다. 이스라엘관 역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러시아와 이스라엘 참여 문제는 심사위원단 전원 사퇴까지 불러오며 이번 비엔날레의 정치적 긴장감을 드러냈다. 국가관 시스템 자체가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국가는 누구를 대표하는가. 예술은 국경을 초월하는가. 비엔날레는 과연 예술의 올림픽인가, 아니면 난민선처럼 흔들리는 정치적 무대인가. 올해 베니스비엔날레는 이 질문들 사이를 흔들리며 항해하고 있다. 99개 국가관과 31개 공식 병행전시가 베네치아 전역에서 펼쳐진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관은 다른 길을 택했다. 최빛나 감독은 국가관을 임시적 광장으로 재구성하며 국가 대표성을 최소화하고 시민적 연대와 관계를 강조했다. 일본관과의 사상 최초 협업은 역사적 갈등을 넘어선 실험으로, 국가주의적 전시 시스템에 작은 균열을 내는 시도였지만 여전히 ‘한국관’이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제도적 긴장은 남는다.
전시 개막 후 해외 미술 전문 매체들은 한국관을 주목했다. 미국 문화매체 Observer는 한국관 ‘해방공간: 요새와 둥지’를 “살아 숨 쉬는 기념비(living, breathing monument)”라 평했고, ARTnews는 올해 ‘톱10 국가관’ 가운데 하나로 선정했다. Whitewall 역시 한국관을 “반드시 봐야 할 국가관”으로 꼽으며 가장 사유적이고 울림 있는 전시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예술감독 최빛나가 기획한 ‘해방공간: 요새와 둥지’는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미완 상태와 균열, 냉전 이후의 감각을 다루되 이를 거대한 역사 서사로 밀어붙이지 않았다. 오히려 최고은·노혜리 작가를 비롯해 연구자, 음악가, 농부, 소설가 등 비시각예술 영역까지 포함한 ‘펠로우십’ 구조를 통해 느슨한 관계망을 전시 형식으로 끌어들였다.
출발점은 한국의 탄핵 정국과 광장 경험이었다. 최빛나 감독은 “2024년 비상계엄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시위를 보며 예술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질문했다”며 “나도 내 방식대로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이번 전시는 단순한 국가관 전시라기보다 임시적인 시민 광장에 가까웠다. 뮤지션 이랑, 사진작가 황예지, 청년 농부 김후주, 소설가 한강, 예술가 크리스티앙 니암페타 등이 참여하며 제주 4·3, 5·18, 탄핵 집회와 여성 연대, 씨앗과 돌봄의 감각을 함께 엮었다.
특히 이번 한국관은 베니스비엔날레 역사상 처음으로 일본관과 협업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경쟁과 대표성 중심으로 작동해온 비엔날레 구조 속에서 인접한 두 국가관이 대화와 교류의 플랫폼을 시도한 것은 이례적이다. 최 감독은 “옆집 일본관과의 협업도 기념비를 확장하는 시도”라며 “두 국가관이 품고 있는 공유된 역사와 새로운 가능성을 연결해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르디니의 한국관은 일본관, 독일관, 영국관, 러시아관 사이에 위치해 있다. 최 감독은 이를 두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영향을 끼쳤던 나라들이 한국관을 둘러싸고 있다”며 “오늘날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자르디니 공원 끝자락, 독일관과 일본관 사이 옛 화장실 부지에 자리한 한국관은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 국가관 가운데 26번째로 뒤늦게 들어섰다. 당시 비엔날레 재단은 더 이상 국가관을 늘리지 않겠다는 방침이었지만, 1993년 백남준의 황금사자상 수상 이후 한국관 건립 논의가 급물살을 타며 지금의 한국관이 세워졌다.
작고 좁은 한국관의 구조 자체를 ‘해방공간’의 은유로 읽은 최빛나 감독은 “사실 한국관은 숨겨져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며 “일본관이나 독일관을 방문한 뒤에야 비로소 발견되는 공간”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한국관 전시는 그 구조를 내부에서 조용히 흔든다. 최고은의 설치 ‘메르디앙(Meridian)’은 한국관 내부를 지나 일본관 방향으로 뻗어나간다. 동파이프는 일본관 울타리를 넘어 땅속으로 파고들었다가 다시 지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막힌 혈관을 뚫는 침처럼, 봉인된 경계를 찌르는 가느다란 신경처럼 보였다.
시각적 스펙터클은 크지 않았다. 대신 ‘메르디앙’은 굳어버린 시대의 혈전을 침술처럼 찌르며 자르디니의 지정학을 은밀하게 흔들었다. 거대한 선언 대신 수행하는 조용한 반란이었다.
노혜리의 설치 ‘베어링’ 역시 얇은 오간자 구조를 통해 관람객이 의례처럼 천천히 한국관을 순환하도록 만들었다. 강강술래처럼 빙글빙글 돌며 이동하는 동선. 요새와 둥지, 내부와 외부, 보호와 저항 사이를 오가는 감각 자체가 ‘해방공간’의 은유였다.
이는 기존 비엔날레의 소비 방식과도 어긋났다. 강렬한 이미지 한 컷이나 SNS용 스펙터클보다 함께 머무는 시간과 감각의 층위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현장 반응은 엇갈렸다. 강렬한 시각적 장면과 대형 설치 중심 국가관에 관람객이 몰린 반면, 한국관은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일부는 “너무 개념적이다”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해외 비평계는 오히려 그 ‘조용한 반란’을 더 예민하게 감지했다.
전쟁의 흔적은 비엔날레 현장을 더욱 무겁게 한다. 예술은 이를 치유하거나 초월하기보다 갈등을 반영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팔레스타인 연대 파업이나 러시아·이스라엘관 앞 시위는 예술이 정치적 현실을 피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예술이 단순히 현실을 반영하는 데 그친다면, 비엔날레는 결국 국제정치의 부속품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한국관을 비롯한 일부 국가관은 올해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단순한 전시 공간을 넘어 정치적 발언과 연대의 장으로 변모했다. 팔레스타인 연대 파업에 동참한 국가관들이 하루 동안 문을 닫았고, 전시장 곳곳에서는 국가관 체계 자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올해 비엔날레는 경쟁과 위계 중심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 속에서 국가관 황금사자상 시상을 진행하지 않았다.
최빛나 감독은 경쟁 중심 구조 자체를 문제 삼았다. 그는 “황금사자상이 폐지됐는데 다시 ‘인기 국가관’을 선정하는 것은 시대 흐름과 맞지 않는다”며 “99개 국가관이 함께 펼치는 비엔날레에서 단 하나를 뽑는 방식은 결국 순위를 매기는 상업적 마케팅 구조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 국가관들과 함께 이런 경쟁 구조 자체를 재고하자는 논의를 제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최 감독의 “왜 순위를 매기나”라는 질문은 단순한 불만이 아니라 비엔날레의 근본적 모순을 겨냥한다. 예술이 국가 단위로 경쟁하는 구조는 창작의 자유를 억압하고, 예술을 외교적 자산으로 소비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실제 올해 비엔날레는 국가관 경쟁 시스템 자체를 흔드는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본전시 ‘In Minor Keys’ 참여 작가 52명은 심사위원단 전원 사퇴에 연대하며 수상 심사 대상에서 제외해달라는 성명을 발표했고, 프랑스·리투아니아·네덜란드 등 16개 국가관 작가들도 이에 동참했다. 올해 비엔날레는 심사위원단 공백 속에 국가관 황금사자상 대신 관람객 투표 방식의 ‘비지터 라이언스(Visitor Lions)’를 도입했으며, 시상은 폐막일인 11월 22일 진행될 예정이다.
해외 언론 역시 올해 비엔날레를 단순한 미술 이벤트가 아니라 지정학적 긴장과 제도 비판이 교차하는 현장으로 읽고 있다. AP통신은 정치적 논란과 국가관 시스템 비판을 집중적으로 다뤘고, 미국 매체 베니티페어는 “낮은 목소리의 감각”이 이번 비엔날레 전반을 관통한다고 분석했다.
한국관은 올해 비엔날레 구조 속에서 의미 있는 균열을 만들어냈다. ‘덜 대표하는 방식’으로 국가주의적 틀을 흔들며, 예술이 국가를 넘어선 연대와 공존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국가 브랜드 대신 관계와 공존, 해방 이후의 미완 상태를 낮은 목소리로 호출했지만, 그것이 제도적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소음을 키우지 않고도 시대를 관통하는 전시. 올해 처음으로 벤치를 놓고 옥상까지 개방한 한국관 ‘해방공간’은 국가관 사이의 경쟁보다 공존의 감각을 상상하는 또 하나의 광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결국 제61회 베니스비엔날레는 ‘예술의 축제’라기보다, 국가주의와 정치적 갈등 속에서 예술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장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번 비엔날레는 9일 공식 개막해 11월 22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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