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관과 접속한 한국관의 조용한 반란…2026 베니스비엔날레 가보니(종합)

기사등록 2026/05/08 16:54:41

최빛나 예술감독 '해방공간:요새와 둥지' 개막

동파이프 ‘메르디앙’, 수풀 경계 넘어 일본관까지 연결

최고은 “침은 공격 아닌 봉합”…노혜리, 피부 같은 오간자 설치

가장 작고 좁은 한국관, 국가주의 전시에 균열 시도

최고은. Corea Pavilion – Bush – Giappone Pavilion . 2026. 《해방공간 요새와 둥지》 설치 전경. 사진 감동환. *재판매 및 DB 금지


[베니스=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인간이 만든 경계는 분명 존재하지만 식물은 계속 자라고 변하면서 그 경계를 흐리게 만든다. 그 모습을 보며 ‘메르디앙’ 개념을 떠올렸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자르디니 끝자락. 한국관에서 뻗어나온 붉은 동(銅) 파이프 한 줄기가 수풀 아래를 지나 일본관으로 스며들었다. 국경처럼 나뉜 국가관 울타리 사이를 파고든 파이프는 거대한 침처럼 일본관 땅 위로 뾰족한 끝을 드러냈다.

[베니스=뉴시스]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 6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베네치아 자르디니 제61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과 일본관 사이 수풀 아래로 최고은 작가의 설치작품 ‘메르디앙(Meridian)’의 동파이프가 길게 이어져 있다. 침술의 바늘처럼 공간의 경계를 관통한 이 작업은 국가관 사이의 연결과 흐름을 상징한다. 2026.05.06. hyun@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제61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전시 ‘해방공간: 요새와 둥지’에 참여한 작가 최고은은 동파이프로 만든 신작 설치 ‘메르디앙(Meridian)’을 선보였다.

최고은은 한국관과 일본관 사이 수풀 경계에 주목했다고 설명했다. 자르디니 공원 내 국가관들은 각 나라가 부지를 나눠 사용하고 있는데, 일본관은 경계를 따라 식물을 심어 한국관과의 영역을 구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많은 관람객들이 그 수풀을 가로질러 이동했고, 사람들이 반복해서 지나간 자리에는 길처럼 빈 틈도 생겨났다. 최고은은 “그래서 실제로 그 경계를 넘어가는 파이프 선을 한국관과 일본관 사이 수풀에 설치했다”며 “바느질 스티치처럼 공간과 공간을 이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가느다란 동파이프는 언뜻 침처럼 보인다. 실제 초기 작업 제목 역시 ‘니들스(Needles)’였다.

최고은은 “침은 단지 찌르고 관통하는 공격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봉합하고 치유할 때도 쓰인다”고 말했다. “‘needle’과 ‘nest(둥지)’가 같은 어원 계열이라는 점이 흥미로웠다”며 “둥지는 가는 선들을 엮고 쌓으며 만들어진다. 제비가 몇 달 동안 나뭇가지를 물어와 집을 짓는 장면을 자주 떠올렸다”고 했다.

작품은 한국관 실내 기둥과 벽, 천장을 관통해 일본관 부지까지 이어진다. 동양의학의 경락처럼 보이지 않는 흐름을 따라 이동하는 금속의 선은 침처럼 공간을 꿰뚫고, 동시에 봉합한다.

[베니스=뉴시스]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 제61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에 참여한 최고은 작가가 6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베네치아 자르디니에서 일본관 방향으로 뻗어 설치한 신작 ‘메르디앙(Meridian)’을 설명하고 있다.  2026.05.06. hyun@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베니스 현장에서 만난 최고은은 “한국관을 하나의 신체처럼 상상했다”며 “실린더 공간 안 기둥을 열어보니 배관과 전선, 난방 시스템 같은 보이지 않는 인프라가 지나가고 있었다. 한국관 전체를 순환시키는 통로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작품 제목 ‘메르디앙’은 지리학적으로 북극과 남극을 잇는 자오선을 뜻하는 동시에, 동양의학에서는 기(氣)가 흐르는 경락을 의미한다. 작가는 보이지 않는 선과 흐름의 구조를 한국관 건축 안에서 발견했다.

그는 “공간에 무엇이 있었고 무엇이 남아 있는지를 보는 과정이 중요했다”며 “창고처럼 쓰이던 실린더 공간을 다시 열고 조각적인 방식으로 공간을 원복하고 싶었다”고 했다.

실제 이번 작업은 한국관 건축 구조 자체에서 출발했다. 일본관과 독일관 사이 비정형 구조로 자리한 한국관은 안과 밖, 자연과 건축의 경계가 뒤섞인 공간이다. 최고은은 그 안에 숨어 있던 배관과 인프라 구조를 오히려 드러내며 새로운 흐름의 감각으로 전환했다.

작업 방식 역시 기존 산업 재료를 낯설게 바라보는 과정에서 나왔다. 최고은은 수도관과 설비에 쓰이는 동파이프를 반으로 절단해 사용했다.

그는 “파이프를 가르는 순간 가장 단단한 구조가 오히려 유연해진다”며 “탄성이 생겨 활처럼 휘어진다. 고정된 구조 안에서도 움직이는 감각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최고은 《해방공간 요새와 둥지》 설치 전경. 2026. 사진 감동환. *재판매 및 DB 금지

[베니스=뉴시스]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 6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베네치아 자르디니 제61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전시 ‘해방공간: 요새와 둥지’ 내부 전경. 노혜리 작가의 오간자 설치작품 ‘베어링(Bearing)’이 공간을 감싸고 있으며, 중앙에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설치작품 ‘더 퓨너럴(The Funeral)’도 전시됐다. 2026.05.06. hyun@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최고은은 자신의 금속 작업이 노혜리의 부드러운 오간자 설치와 상반된 감각을 만든다고 설명했다.

그는 “노혜리 작가의 작업이 내부에 막과 피부 같은 공간을 만든다면, 제 작업은 외부에서 선들이 위아래로 이동하며 다른 흐름을 만든다”며 “국가나 공동체 안에서도 개인은 고정돼 있으면서 계속 움직인다. 물리적으로는 멈춰 있지만 흐르고 있는 상태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1995년 한국관 설립 이래 국가관 사이 경계를 처음 넘어선 메르디앙은 개막식 퍼포먼스도 변화시켰다. 동파이프로 수풀 경계를 넘은 것처럼 한국관으로 들어온 일본관 관계자들은 “오메데또(축하합니다)”와 “축하합니다”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끌어안았다.

‘인 마이너 키즈(In Minor Keys·단조로)’를 주제로 한 이번 비엔날레에서 한국관은 그 어느 해보다 베니스와 깊게 접속하며, 조용하지만 은밀하게 연결을 시도하는 하나의 제스처가 되고 있다.

[베니스=뉴시스] 사진=박현주미술전문기자 =(현지시간) 이탈리아 베네치아 자르디니에서 개막한 제61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해방공간: 요새와 둥지’ 전시장에서 최빛나 예술감독이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이번 한국관은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균열과 공존, 돌봄과 생존의 감각을 ‘요새’와 ‘둥지’라는 이중적 은유로 풀어낸다. 2026.05.06. hyun@newsis.


자르디니 공원 끝자락, 독일관과 일본관 사이 옛 화장실 부지에 세워진 한국관은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 국가관 가운데 26번째로 뒤늦게 들어섰다. 당시 베니스비엔날레 재단은 더 이상 국가관을 늘리지 않겠다는 방침이었지만, 1993년 백남준의 황금사자상 수상 이후 한국관 건립 논의가 급물살을 타며 지금의 한국관이 세워졌다.

작고 좁은 한국관의 구조 자체를 ‘해방공간’의 은유로 읽은 최빛나 예술감독은 “사실 한국관은 숨겨져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며 “일본관이나 독일관을 방문한 뒤에야 비로소 발견되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관이라는 구조물이 한국이라는 국가를 대표한다고 볼 때, 그 모호한 상태에 이름을 붙인 것이 바로 ‘요새와 둥지’”라며 “이 양가성이야말로 모든 국가에 질문을 던진다”고 설명했다.

이어 “‘해방공간’ 역시 본질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상태”라며 “바로 그 개방성 덕분에 요새와 둥지라는 두 조건을 함께 담아내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 역시 상상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베네치아=AP/뉴시스] 5일(현지 시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열리는 제61회 베니스 비엔날레 행사장 주 출입구 앞에 가자지구에서 사망한 예술가들의 이름이 적힌 옷을 입은 팔레스타인인들이 모여 있다. 이들은 가자지구 전쟁으로 희생된 예술인들을 추모하고 국제 사회의 관심을 촉구하는 평화 시위를 진행했다. 한편, ‘예술계 올림픽’으로 통하는 베니스 비엔날레는 9일부터 11월 22일까지 약 7개월간 열린다. 2026.05.06.


1895년 시작된 베니스비엔날레는 세계 최고 권위의 국제미술제로 꼽힌다. 올해는 99개 국가관과 31개 공식 병행전시가 베네치아 전역에서 펼쳐진다.

세계의 미술올림픽에서 전쟁의 여파로 정치적 국제정세의 축소판이 된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국가관들 사이에서, 한국관은 이전에는 보기 어려웠던 장면을 만들어냈다.

베니스비엔날레 국가관 가운데 가장 좁고 작은 공간으로 꼽히는 한국관의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반란이다.

《해방공간 요새와 둥지》 한국관 전경. 2026. 사진 감동환. *재판매 및 DB 금지


거대한 스케일과 압도적 설치로 관람객을 몰아붙이는 주변 국가관들과 달리, 한국관은 조용한 분위기다. 작고 좁은 공간, 존재를 과시하지 않는 작품들은 오히려 전시 제목처럼 ‘해방공간: 요새와 둥지’로 작동하고 있다.

1층에서 2층, 옥상까지 시야가 트인 개방감 속에서 느린 호흡과 머무름의 감각을 만들어낸다. 이전에는 막혀 있던 실린더 공간은 다시 열렸고, 옥상에는 처음으로 흰 벤치까지 놓였다.

이랑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옥상에서는 유리천장 아래로 스며드는 빛과, 참여 작가들 못지않게 주목받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텍스트가 어렴풋이 드러난다. 국가관이라기보다 잠시 숨을 고르는 쉼터에 가까운 장면으로, 한국관은 관람객들의 또 다른 ‘요새’가 되고 있다.

이범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역시 흰 벤치에 앉아 싱가포르 등 해외 국가관 관계자들과 담소를 나눴다. 그는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며 “이번 벤치는 전시 이후에도 기증돼 계속 유지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시각적 스펙터클은 크지 않지만, 작은 한국관이 거대한 국가주의적 전시 시스템 안에 조용히 만들어낸 균열이 이번 베니스비엔날레에 어떤 울림을 남길지 주목된다.

세계 미술의 올림픽으로 불리는 제61회 베니스비엔날레는 9일 공식 개막해 11월 22일까지 이어진다.
노혜리. 〈베어링〉. “기억하는 스테이션.” 2026. 《해방공간 요새와 둥지》 설치 전경. 사진 감동환. *재판매 및 DB 금지



◎공감언론 뉴시스 hyun@newsis.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