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의 아들’ 이배, 숯으로 쌓은 염원…뮤지엄 산, 첫 한국 작가 조명

기사등록 2026/04/06 15:30:45 최종수정 2026/04/06 17:28:56

유럽 등 해외가 먼저 읽은 ‘숯의 작가’ 로 유명

뮤지엄산, 이배 대규모 개인전 ‘기다리며’ 개막

30년 예술 세계…소멸에서 생성으로 향한 여정

[원주=뉴시스] 박진희 기자 = '숯작가' 이배가 6일 강원 원주시 뮤지엄 산에서 열린 개인전 'En attendant: 기다리며' 기자간담회에 앞서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그는 30여 년간의 작업을 중심으로 숯을 매개로 자연과 인간, 시간과 존재가 교차하는 관계망을 심층적으로 조망한다. 이번 전시는 뮤지엄 SAN 개관 이래 최초로 선보이는 국내 작가 개인전이다. 2026.04.06. pak7130@newsis.com


[원주=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나는 농부의 아들입니다.”

숯을 쌓고, 흙을 갈고, 검정을 세운 작가 이배는 이번 전시에서 가장 먼저 자신의 정체성으로 돌아갔다.

강원 원주의 뮤지엄 산에서 열린 개인전 ‘En attendant: 기다리며’는 단순한 회고가 아니다.

지난 3년간 20여 차례 미술관을 오가며 준비한 이번 전시는 그에게 “나를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6일 뮤지엄 산에서 만난 그는, 질문으로 말하는 사람이었다. “40년 가까이 외국에서 떠돌며 작업하다 보니, 내가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다시 묻게 됐습니다.”

그에게 작업은 캔버스 위의 표현이 아니라, 흙 → 나무 → 불 → 숯으로 이어지는 순환을 몸으로 되짚는 행위다.

“이 전시는 근원에 대해, 다시 나를 확인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내가 어디에서 왔고, 무엇으로 여기까지 왔는지를 돌아보는 시간이었죠.”

숯은 더 이상 재료가 아니다. 이배라는 작가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지금은 ‘숯의 작가’ 이배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외에서 러브콜이 이어지고 작품은 나오자마자 팔려나간다. 이른바 ‘품절 작가’다. 

 국제적으로 활동하며 1995년 국내 미술계에 소개된 작품은 2000년 가장 권위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2013년 한국미술비평가협회 작가상을 수상하며 한국 화단에서도 인정 받았다. 2015년에는 유럽 최대의 동양예술품 박물관 프랑스 국립 기메 동양박물관에서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2024년 베니스비엔날레 전시, 독일 에스더 쉬퍼 갤러리 전속 합류 등을 통해 국제적 위상도 더욱 공고해졌다.

그가 붙들어온 ‘숯’은 소멸 이후 남은 물질에서 출발해, 시간과 존재를 사유하는 하나의 언어로 확장됐다.

[원주=뉴시스] 박진희 기자 = '숯작가' 이배가 6일 강원 원주시 뮤지엄 산에서 열린 개인전 'En attendant: 기다리며' 기자간담회에 앞서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그는 30여 년간의 작업을 중심으로 숯을 매개로 자연과 인간, 시간과 존재가 교차하는 관계망을 심층적으로 조망한다. 이번 전시는 뮤지엄 SAN 개관 이래 최초로 선보이는 국내 작가 개인전이다. 2026.04.06. pak7130@newsis.com


◆ “화가를 반대했던 아버지…나는 농부의 아들이었다”
이배의 작업은 캔버스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출발점은 논과 흙, 그리고 아버지의 기억이다.

“아버지는 제가 화가가 되는 걸 굉장히 반대하셨습니다. 농부가 되기를 바라셨죠.”

경북 청도 출신인 그는 과수원을 일구던 아버지 아래서 자랐다. 아버지는 아들이 붓이 아닌 땅을 이어받기를 바랐다.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그는 1990년 프랑스로 건너갔다. 이후 파리를 기반으로 작업을 이어왔다.

이배에게 이번 전시는 단순한 형식적 시도가 아니다. 그는 작업을 “기도에 가까운 행위”라고 표현했다.

“이 전시는 저에게 굉장히 두려운 시간이었습니다. 공간도 크고 개념적으로도 강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계속 고민했습니다. 농부가 땅을 파면서 기도하듯이… 저도 그런 마음으로 작업했습니다. 그 이상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작가가 반복해서 언급한 ‘농부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은 이 지점에서 더욱 또렷해진다.

작가는 그 기억을 이번 전시에서 다시 꺼냈다. 흙을 직접 만지고 쓸어내는 퍼포먼스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논에 물을 대고, 땅을 고르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릴 때 그곳에서 자랐고 뛰어놀았죠. 그 기억이 이번 작업으로 이어졌습니다.”

화가를 반대했던 아버지는 그가 프랑스에 있는 동안 세상을 떠났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는데… 그때 저는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했습니다.”

말을 아끼는 짧은 문장이었지만, 이번 전시가 왜 ‘근원’으로 향하는지 설명해주는 대목이었다.

청조갤러리 3은 이러한 정체성을 집약한 공간이다. 9m 높이 스크린 속 퍼포먼스와 청도에서 옮겨온 흙 설치가 결합되며,
땅·신체·시간이 하나의 순환 구조로 작동한다.
[원주=뉴시스] 박진희 기자 = 한솔문화재단의 뮤지엄 SAN은 6일 강원 원주시 뮤지엄 산에서 한국 현대 미술 작가 이배의 개인전 'En attendant: 기다리며' 기자간담회를 갖고 숯을 매개로 자연과 인간, 시간과 존재가 교차하는 관계망을 심층적으로 조망한 작품 '불로부터(Issu du feu)'를 선보이고 있다. 이번 전시는 뮤지엄 SAN 개관 이래 최초로 선보이는 국내 작가 개인전이다. 2026.04.06. pak7130@newsis.com


◆ “파리에서 무너진 정체성…숯이 시작이었다”
이배의 숯 작업은 1990년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됐다.

“전 세계 문화가 모여 있는 곳이었지만, 오히려 나에게는 정체성의 혼란을 안겨준 공간이었습니다.”

문제는 ‘언어’였다. 서양 미술의 개념으로는 동양의 감각을 설명하기 어려웠다.

“수묵이나 먹, 여백 같은 개념은 정확히 전달되지 않습니다. 겸재 정선이나 추사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이해하지 못하지만,
미켈란젤로나 고야를 말하면 바로 통하죠.”

그 간극 속에서 숯은 하나의 해법이 됐다.
[원주=뉴시스] 박진희 기자 = 한솔문화재단의 뮤지엄 SAN은 6일 강원 원주시 뮤지엄 산에서 한국 현대 미술 작가 이배의 개인전 'En attendant: 기다리며' 기자간담회를 갖고 숯을 매개로 자연과 인간, 시간과 존재가 교차하는 관계망을 심층적으로 조망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이번 전시는 뮤지엄 SAN 개관 이래 최초로 선보이는 국내 작가 개인전이다. 2026.04.06. pak7130@newsis.com


◆ “가난해서 시작한 숯…결국 나의 언어가 됐다”
“물감을 살 수 없어서 바비큐용 숯을 샀습니다.”

우연한 선택은 작업의 방향을 바꿨다. “숯이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내가 말할 수 있는 방식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숯은 먹처럼 동양적이면서도 물질성을 드러내는 매체다. 그에게 숯은 설명이 아니라 ‘직접 드러내는 언어’였다.

“재료 자체가 메시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과거에는 동양성을 드러내는 것이 장벽이었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이제는 한국이라는 정체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시기가 됐습니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원주=뉴시스] 박진희 기자 = 한솔문화재단의 뮤지엄 SAN은 6일 강원 원주시 뮤지엄 산에서 한국 현대 미술 작가 이배의 개인전 'En attendant: 기다리며' 기자간담회를 갖고 숯을 매개로 자연과 인간, 시간과 존재가 교차하는 관계망을 심층적으로 조망한 작품 '붓질 Brushstroke'을 선보이고 있다. 이번 전시는 뮤지엄 SAN 개관 이래 최초로 선보이는 국내 작가 개인전이다. 2026.04.06. pak7130@newsis.com


◆ “30년 붙잡은 숯은 반복 아니다…아직 다 이해하지 못했다”
이배에게 숯은 끝난 재료가 아니다.

불에 타고 남은 것, 그러나 동시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상태.

“아직도 숯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숯은 완성된 언어가 아니라 여전히 진행 중인 질문이다.  "숯은 인간의 의도를 벗어난 물질, 일종의 카오스에 가깝다.”

◆ “재앙 이후,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강원 고성 산불 현장을 직접 봤습니다.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후 스페인, 캐나다로 이어진 대형 산불. 숯은 더 이상 재료가 아니라 재앙 이후의 기억이 됐다.

“우리는 재앙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를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그의 숯은 이제 치유와 염원으로 나아간다. "조각은 기념비가 아니라 염원이었다. 다시는 이런 재앙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인간적인 바람이 담겼다.”

야외에 세운 거대한 숯 조형물은 숲이자 흔적이며, 동시에 하나의 토템이다.

주변의 나무와 건축, 산세와 호응하도록 배치된 약 10m 규모의 브론즈 ‘붓질(Brushstroke)’ 6점은 자연과 조형, 공간을 하나의 풍경으로 묶는다.

“조각의 표면을 봐주셨으면 합니다. 그림 같은 조각을 할 수 없을까, 늘 생각합니다."

그는 조각을 덩어리가 아니라 ‘표면’으로 보려 했다. 그 결과 검은 조각은 부피가 아니라 흔적이 된다.

그는 "작가란 무엇인지, 예술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면서  "그래서 더 순수해지려 노력한다”고 했다.


[원주=뉴시스] 박진희 기자 = 한솔문화재단의 뮤지엄 SAN은 6일 강원 원주시 뮤지엄 산에서 한국 현대 미술 작가 이배의 개인전 'En attendant: 기다리며' 기자간담회를 갖고 숯을 매개로 자연과 인간, 시간과 존재가 교차하는 관계망을 심층적으로 조망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이번 전시는 뮤지엄 SAN 개관 이래 최초로 선보이는 국내 작가 개인전이다. 2026.04.06. pak7130@newsis.com



◆ 공간 전체를 걷는 전시…‘보는 것’에서 ‘경험’으로
이번 전시는 공간 전체를 따라 이동하며 완성된다.

입구의 ‘불로부터(Issu du feu)’는 관람객을 멈춰 세우고, 로비의 ‘붓질(Brushstroke)’은 자연과 함께 흐른다.

청조갤러리 1, 2는 ‘White’와 ‘Black’로 나뉜다. 검정은 모든 색을 품은 심연, 흰색은 아직 시작되지 않은 가능성이다. 안도 타다오 건축물과 어우러진 회화, 조각, 설치, 영상까지, 작가의 작업은 전례 없는 스케일로 펼쳐진다.

그러나 이 전시는 ‘보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관람객이 공간을 따라 걷고, 작품 사이를 통과할 때 비로소 예술과 자연은 하나의 경험으로 완성된다.

전시 제목 ‘기다리며’는 완성 이전, 생성 직전의 시간을 의미한다.

뮤지엄 산이 이배를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뮤지엄 산 안영주 관장은 “해외 거장들만 전시하던 기획에서 초심으로 돌아가 한국 작가를 조명하자는 방향 속에서 작품성과 동시대성을 갖춘 작가로 이배를 선택했다”며 “3년간의 준비 끝에 완성된 전시”라고 밝혔다.

[원주=뉴시스] 박진희 기자 = 한솔문화재단의 뮤지엄 SAN은 6일 강원 원주시 뮤지엄 산에서 한국 현대 미술 작가 이배의 개인전 'En attendant: 기다리며' 기자간담회를 갖고 숯을 매개로 자연과 인간, 시간과 존재가 교차하는 관계망을 심층적으로 조망한 작품 'White'를 선보이고 있다. 이번 전시는 뮤지엄 SAN 개관 이래 최초로 선보이는 국내 작가 개인전이다. 2026.04.06. pak7130@newsis.com


숯이라는 가장 단순한 물질에서 출발한 그의 작업은 이제 동시대 미술에서 가장 강력한 조형 언어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이번 전시는 K아트의 현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서체적 추상 회화와 대형 설치로 확장된 그의 작업은 이미 유럽 미술계에서 검증된 언어다.

그러나 이 같은 규모와 밀도의 전시는 여전히 국내 공공미술관에서 충분히 조명되지 못하고 있다.

해외에서 먼저 인정받고, 뒤늦게 국내에서 재발견되는 흐름.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할 작가는 누구인가. 이배의 이번 전시는 그 질문을 다시 꺼내 놓는다. 전시는 12월 6일까지.


[원주=뉴시스] 박진희 기자 = 한솔문화재단의 뮤지엄 SAN은 6일 강원 원주시 뮤지엄 산에서 한국 현대 미술 작가 이배의 개인전 'En attendant: 기다리며' 기자간담회를 갖고 숯을 매개로 자연과 인간, 시간과 존재가 교차하는 관계망을 심층적으로 조망한 작품 '불로부터(Issu du feu)' 부분 모습이 보이고 있다. 이번 전시는 뮤지엄 SAN 개관 이래 최초로 선보이는 국내 작가 개인전이다. 2026.04.06. pak7130@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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