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70대 레즈비언 할머니의 회고록…'침대와 침대를 오가며'

기사등록 2026/03/03 14:49:14
[서울=뉴시스] 퍼트리샤 그레이홀 '침대와 침대를 오가며' (사진=물결점 제공) 2026.03.03.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한이재 기자 = 동성애가 정신질환으로 취급받던 시절, 한 여성은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기로 했다. 퍼트리샤 그레이홀의 회고록 '침대와 침대를 오가며'(물결점)는 성별을 넘어 사랑을 찾아 살아온 한 인간의 기록이다.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이자 전직 내과 전문의인 그레이홀은 이 책에 대해 "내가 이정표 없는 바다를 헤쳐나갔던 이야기. 폭풍에 휩쓸려 만신창이가 되면서도 결코 부서지지 않았던 그 이야기"라고 말한다.

회고록의 배경은 1960~70년대 미국이다. 동성애가 정신질환으로 분류되고, 성 정체성이 드러날 경우 경력과 신변이 위협을 받았다. 동시에  '스톤월 항쟁'을 기점으로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확산되고, 타이틀 나인 제정과 로 대 웨이드 판결 등 사회적 변화의 조짐이 일던 시대였다. 억압과 균열이 공존하던 환경 속에서 저자는 의사로서, 또 한 여성으로서 자신의 욕망과 마주했다.

책은 저자가 '애리조나 주에서 유일한 레즈비언'이라 여겼던 10대 시절부터 시작한다. 고립과 두려움 속에서도 그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1970년대 초반 솔트레이크시티에서는 게이 룸메이트와 사실혼인 척하며 사회의 눈을 피했고, 이후 보스턴에서는 보다 자유롭게 여러 연인들을 만나며 관계의 경계를 실험했다.

영어판 제목 '회진(Making the Rounds)'은 병원에서 의사가 환자들의 침대를 돌아다니며 진찰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동시에 연인들의 침대를 오간다는 중의적 의미도 갖는다. 저자는 병동과 연인의 공간을 오가며 직업적 책임과 개인적 욕망 사이의 모순을 진단하듯 들여다본다.

"한때 나는 배려심 있고 잘 챙겨주는 여자를 원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커리어를 치열하게 추구하는 여자, 내 눈에 섹시하고 호감 가는 여자를 원했다."(266쪽)

저자의 고백처럼 책 속에는 레즈비언이 의사가 된 결과보다 성차별과 동성애 혐오가 만연했던 시기 한 인간이 사랑에 도전하고 실패했던 과정이 더 드러난다.

독점적 관계와 다자연애를 넘나들고, 폭력적인 모습도 보이는 등 일흔이 넘은 저자의 이기적이고 서툴렀던 지난날에 대한 고백이자, '사랑을 통한 성장'에 방점이 찍힌 기록이기도 하다.

"나는 내가 함께하고 싶은 그 여자가 되기로 했다."(4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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