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만 명의 체온을 '촉각적 사건’으로 작품
학고재서 개인전…코끼리 조각~점자책까지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우리가 졌어요. 너무 본 게 많아서 졌어요.”
‘하얀 코끼리’ 작가로 알려진 엄정순(65)이 26일 서울 학고재에서 열린 개인전 ‘보푸라기-촉각적 사건’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패배라니. 이미지의 홍수 속에 사는 우리가 왜 진 것일까.
“이미지는 넘쳐나요. 그런데 감각은 비어 있어요.”
그의 발언은 전시 설명을 넘어, 정보 과잉 시대에 대한 진단에 가까웠다.
이번 전시는 2023년 광주비엔날레 참여작 ‘코없는 코끼리’에서 출발한다. 당시 관객은 작품을 직접 만질 수 있었다. 약 50만 명이 코끼리를 스쳤고, 양모 표면에는 대량의 보푸라기가 생겨났다.
처음에는 제거 대상이었다. 지저분하고 통제 불가능하며 의도되지 않은 흔적처럼 보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내가 어떻게 50만 명을 만나겠어요.”
엄 작가는 관점을 바꿨다.
“보푸라기는 사람들의 체온입니다.”
관객의 마찰과 온도, 감정의 축적은 더 이상 오염이 아니라 증거가 됐다. 그는 이를 ‘촉각적 사건’이라 명명했다.
“교통사고 같은 물리적 사건이 아니라, 감각과 사고의 방향이 틀어지는 순간이라는 뜻입니다.”
만지는 행위는 단순한 접촉이 아니라 감상의 확장이고, 관객의 신체적 참여 역시 작품의 일부가 된다. 미술관의 “만지지 마세요”라는 규칙이 뒤집히는 순간, 작품은 표면이 아닌 관계가 된다.
엄정순은 오랫동안 시각장애인 미술 교육 프로젝트를 이끌어왔다. 그는 ‘본다’는 행위 자체를 의심해왔다고 말했다.
“우리는 눈을 뜨고 있지만 무엇을 보고 있는지 모릅니다. 시각은 가장 불안정한 감각인데도 우리는 지나치게 눈에 의존하고 있어요.”
학고재 전시장에는 천 권이 넘는 점자책이 설치됐다. 바람이 불면 페이지가 넘겨진다. 눈으로는 읽히지 않지만, 손끝으로는 접근 가능한 텍스트다. 전시는 읽기와 보기의 관계를 근본부터 다시 묻는다.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코 없는 코끼리’ 시리즈 역시 같은 문제의식 위에 놓인다. 코끼리는 ‘맹인모상(盲人摸象)’의 은유처럼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사유하는 장치다.
“인간의 감각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 파편과 모서리를 통해 전체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해체된 일부를 제시하는 작업은 완결성 대신 불완전성을 인정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엄 작가는 최근 AI 환경과 감각의 문제도 언급했다.
“AI는 데이터와 시각 중심으로 작동합니다. 촉각과 후각 같은 근접 감각은 아직 인간의 영역이죠.”
다만 그는 촉각을 신성화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촉각을 특별한 감각으로 올려 세우자는 게 아닙니다. 감각을 수평적으로 확장하자는 제안입니다.”
그는 이를 ‘촉각의 민주화’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눈에 과도하게 집중된 감각의 권력을 분산시키고, 서로 다른 감각들이 동등하게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는 또 다른 변화가 있다. 화면에 한국어와 일본어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작업을 하면 다들 영어를 쓰잖아요. ‘템포럴 스페이스’ 같은 말을 쓰면 있어 보이니까요. 그런데 이번에는 일부러 한국어를 썼어요.”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예전에는 우리가 외국 소설이나 기사를 보다가 프랑스어나 독일어가 나오면 일부러 찾아봤잖아요. 이제는 외국 사람들이 한국어를 찾아봐야죠.”
세계 미술계의 관행처럼 굳어진 영어 중심의 언어 질서에 대한 작은 균열이다. 감각의 위계를 묻는 작업은 동시에 언어의 위계 역시 질문한다.
전시는 천 권이 넘는 점자책 설치와 함께 조각·회화 작업을 선보인다. 관객의 접촉과 시간이 남긴 흔적을 회화의 언어로 옮기며,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시각 중심의 인식 구조를 다시 묻는다.
이미지를 과잉 소비한 시대. 정보는 축적됐지만 감각은 빈곤해졌다.
엄정순은 보푸라기라는 미세한 잔여를 통해 그 균열을 드러낸다. 시각 중심의 질서를 흔들고, 감각과 언어의 위계를 다시 배치하자고 말한다.
그리고 묻는다. 우리는 지금, 무엇으로 세계를 만나고 있는가. 전시는 3월 28일까지. 관람은 무료.
◆엄정순은 누구?
충주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헨대학교 대학원 회화과를 수료했다. 건국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교수를 역임했다. 1996년 사단법인 ‘우리들의 눈’을 설립해 맹학교 미술교육, 출판, 전시, 예술교육 프로젝트 등을 이끌어왔다.
2023년에는 ‘광주비엔날레 박서보 예술상’(상금 10만 달러)의 첫 번째 수상자로 선정됐다. 개인전으로는 ‘보푸라기-촉각적 사건’(2026, 학고재), ‘시그널 온 세일: 시간의 주름’(2025, 학고재), ‘흔들리는 코끼리’(2024, 두손 갤러리), ‘엘리펀트 워크’(2015, 앤트러사이트) 등이 있다.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국립민속박물관, 예술의전당, 삼성문화재단 등에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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