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인 심연에 닿는 법…가재발·에코하우스

기사등록 2026/02/23 09:26:30

22일 틸라 그라운드서 열린 사운드 테라피 '나우톤' 리뷰

[서울=뉴시스] 가재발. (사진 = 위사 제공) 2026.02.23.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코로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입으로 숨을 내뱉으세요. 어깨는 귀에서 멀리 떨어뜨려 무겁게 내려놓고, 양팔은 나뭇가지처럼 무겁게 늘어뜨립니다."

22일 오전 11시 서울 상수동 틸라 그라운드. 명상 가이드 겸 멘토링 코치인 대니 애런즈(Danny Arens)의 나직한 목소리가 공간을 유영한다. 관객들은 눈의 긴장을 풀고, 턱과 이마의 힘을 뺀 채 감각을 깨운다.

그럼에도 잡념이 계속 올라오는데 그게 정상이라고 애런즈는 관객들, 아니 체험자들을 안심시킨다. "다시 숨으로 돌아오시면 됩니다." 이 차분한 도입부는 곧이어 펼쳐질 거대한 사운드스케이프를 맞이하기 위한 일종의 제의(祭儀)다.

이 의식의 기저에는 소리의 한계를 넓혀온 전자음악의 역사가 깔려 있다. 국내 일렉트로니카 1세대로 유럽 테크노 신을 호령하고, K팝 프로듀서를 거쳐 오디오 비주얼 그룹 '태싯그룹'과 페스티벌 '위사(WeSA)'를 이끌어온 가재발(이진원)의 궤적이 이를 증명한다.

기승전결을 강요받던 음악 문법에서 벗어나 '빼기의 미학'과 모듈러 신시사이저의 원초적 질감으로 회귀한 그의 음악적 철학은, 오늘 이곳 상수동에 모인 이들이 왜 소리를 통해 내면으로 침잠하려 하는지에 대한 훌륭한 서문이 돼 준다.

◆역동에서 심연으로…K-사운드의 진화와 에코하우스

명상으로 이완된 시공간을 채우는 것은 듀오 '에코하우스(Echohouse)'다. 국가무형유산 가곡 이수자 이기쁨과 미국 출신 현대음악 작곡가 레이철 에펄리는 '정가(正歌)'와 '앰비언트(Ambient)'라는 낯설고도 필연적인 결합을 선보인다.

한국 대중음악이 방탄소년단(BTS)과 블랙핑크로 대변되는 '역동성'과 '화려함'으로 세계를 매료시켰다면, 이제 그 시선은 이면에 숨겨진 '정적인 심연'과 '절제의 미'를 향하고 있다. 에코하우스의 음악은 종묘제례악을 테크노로 재해석했던 '해파리(HAEPAARY)'의 성취와 또 다른 결을 선보인다. 소리를 통한 적극적인 치유, 즉 '사운드 테라피'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서울=뉴시스] 에코하우스. (사진 = 나우톤 인스타그램 캡처) 2026.02.23.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관객들은 의자가 아닌 요가 매트 등에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숲에서 시작해 물속(Underwater), 우주(Space), 사막(Desert)을 거쳐 다시 숲으로 돌아오는 5단계의 여정. 신시사이저와 루프 스테이션이 빚어내는 무중력의 공간 위로, 긴 호흡으로 감정을 다스리는 정가의 구음이 얹혀진다.

◆고독한 골방에서 피어나는 묵음의 연대

흥미로운 것은 이 철저히 개인적인 체험이 역설적으로 '연대감'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최근 틸트, 성수율, 인현골방 등 전문 음향 기기를 갖춘 음악 감상 공간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사람들은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고, 서라운드 시스템이 갖춰진 어두운 방에 모여 누군가의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통째로 듣는다.

이날 틸라 그라운드에서의 경험도 이와 맞닿아 있다. 관객들은 눈을 감고 각자의 짙은 고독 속으로, 자신만의 좁은 '골방'으로 걸어 들어간다. 앰비언트 음악은 공간을 지배하지 않고 공간의 일부가 돼 철저한 개인의 시간을 보장한다. 하지만 수십 명의 사람들이 같은 시공간에서 나란히 누워, 같은 주파수의 소리를 호흡하고 있다는 감각은 기묘한 위로를 건넨다. 지난해 7월 세종문화회관 '싱크넥스트(Sync Next 25)' 개막공연으로 무대에 오르는 싱어송라이터 루시드폴, 정가 가객 정마리, 설치미술가 부지현의 작업도 그랬다.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바닥에 누운 관객들은 마치 심연에 침잠하듯 보였지만, 공연 예술의 새로운 조류 속에서 위로 받았다.

에코하우스가 상수동에서 증명했듯, 강렬한 시청각 자극에 관객을 객체화시키는 대신 관객 스스로 주체가 돼 초월적 몰입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이제 흐름이 됐다. 자극 과잉과 번아웃의 시대, 음악이 줄 수 있는 가장 우아한 형태의 저항이자 치유다.


◎공감언론 뉴시스 realpaper7@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