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강세·'병렬 독서' 흐름 맞물려 '앤솔러지' 주목
지난해 '앤솔러지' 판매량 2024년 대비 33% 증가
출판사, 발빠르게 대응… '브랜드' 잇따라 선보여
[서울=뉴시스] 조기용 기자 = 한 작가의 이름보다 한 권의 '주제'가 먼저 눈에 띄는 책들이 늘고 있다. 여러 작가의 단편을 한데 묶은 '앤솔러지(Anthology)' 문학이 최근 서점가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독서 환경과 출판 전략이 동시에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앤솔러지는 동시대 한국문학을 읽는 하나의 방식으로 자리 잡는 중이다.
이 같은 변화는 최근 한국문학 전반의 회복 흐름, 그 중에서도 소설 분야의 강세와 맞물려 나타나고 있다. 중·단편 소설을 중심으로 한 신작 출간이 이어지고 독자층도 다시 확장되면서, 개별 작품을 넘어서 '지금 무엇이 쓰이고 있는가'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이다. 동시대 소설 지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형식인 앤솔러지가 주목받는 이유다.
◆동시대 감각을 한눈에 파악하려는 욕구
출판계 안팎에서는 최근 앤솔러지 문학의 확산 배경으로, 한 작가의 세계를 깊이 따라가기보다 동시대 문학의 감각과 문제의식을 한눈에 파악하려는 독서 경향의 확산을 꼽는다. 지금 한국문학 안에서 어떤 정서와 질문이 동시에 출현하고 있는지를 빠르게 읽고자 하는 요구가 커졌다는 분석이다.
박혜진 문학평론가는 "앤솔러지는 개별 작가의 성취를 넘어, 동시대 문학이 어떤 감각을 공유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형식"이라며 "지금 문학이 어디쯤 와 있는지를 가늠하려는 독자들의 욕구와 맞닿아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흐름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예스24에 따르면 앤솔러지(소설·시 분야) 출간 종수는 2024년 122종에서 지난해 140종으로 소폭 증가했다. 출간 종수의 증가 폭은 크지 않지만, 독자 반응은 보다 뚜렷하다. 앤솔러지 연간 판매량을 분석한 결과, 2024년에는 전년 대비 2.6% 증가했고 지난해에는 전년보다 33%나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책 한 권으로 넓어지는 시야
앤솔러지는 하나의 주제를 여러 작가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며 독자에게 입체적인 독서 경험을 제공한다. 단일한 시선이 아닌 복수의 관점이 병치되면서, 독자는 하나의 문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마주하게 된다.
평소 선호하던 작가의 참여를 계기로 책을 집어 들었다가, 다른 단편을 통해 새로운 작가를 발견하는 과정 역시 앤솔러지가 제공하는 중요한 독서 경험이다. 이러한 '시야 확장'의 만족도는 독자들이 앤솔러지를 반복적으로 찾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여러 권을 동시에 읽는 '병렬 독서'가 확산되면서, 짧은 호흡으로 다양한 세계를 넘나들 수 있는 앤솔러지는 젊은 독자층과의 궁합도 좋다는 평가다.
◆독서 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출판사의 기획
이같은 독서 방식의 변화는 출판사들의 기획 전략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독자 취향이 세분화되고 신간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출판사들은 명확한 주제와 콘셉트를 전면에 내세운 앤솔러지를 통해 독자와의 접점을 넓히고 있다.
앤솔러지는 일회성 기획을 넘어, 출판사의 편집 철학과 기획 방향을 드러내는 하나의 브랜드 형식으로도 기능한다. 어떤 주제를 어떻게 묶어 보여주느냐가 곧 출판사가 바라보는 동시대 문학의 시선이 되기 때문이다.
박 평론가는 "앤솔러지 기획은 지금 문학 안에서 반복적으로 감지되는 정서와 질문을 포착하는 데서 출발한다"며 "작품들 사이의 관계와 배열을 통해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편집의 과정 자체가 동시대 한국문학에 대한 비평적 응답이 된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앤솔러지 브랜드는 문학과지성사의 '소설 보다'와 열린책들의 '하다 앤솔러지'(열린책들)다. '토막 난 우주를 안고서'(허블), '우리는 사랑하기 좋은 팔을 가졌구나'(민음사), '멋진 실리콘 세계'(문학동네) 등 기획 앤솔러지도 잇따라 출간됐다.
앤솔러지 강세는 판매 지표에서도 나타난다.
예스24에 따르면 '소설 보다' 시리즈는 지난해 매출이 전년보다 96.1% 증가했다. '앤솔러지(소설·시)' 베스트셀러 집계에서는 '소설 보다' 시리즈가 상위 10위권 내에 3권(여름 4위, 봄5위, 가을 7위)이나 들었다,
허단 문학과지성사 편집자는 "분기마다 '이 계절의 소설'을 선정하고, 선정위원과 작가의 인터뷰를 엮어 1년에 4권 출간하는 시리즈"라며 "계절의 리듬과 작품 세계를 결합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동시대의 최전선에 있는 문학을 출판사의 개성이 담긴 다양한 큐레이션으로 가볍게 접할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앤솔러지 문학이 주목받는 이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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