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단 한 문장으로 쓴 거장의 묵시록…'헤르쉬트 07769'

기사등록 2026/01/14 16:06:25
[서울=뉴시스] '헤르쉬트 07769' (사진=알마 제공) 2026.01.14.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조기용 기자 =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헝가리 작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가 선정되자 독자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그의 차기작으로 향했다.

국내에 라슬로의 작품을 독점 소개해온 출판사 알마는 그의 소설 '헤르쉬트 07769'를 최근 출간했다. 2021년 헝가리에서 발표된 소설로, 알마가 노벨상 수상 직후 국내 출간을 예고했던 작품이다.

 '헤르쉬트 07769'는 라슬로의 작품세계가 가장 응축된 소설로 평가받는다. 묵시록적 문체와 음울한 분위기, 일상적인 소재 속에서 재앙을 포착하는 시선 등 작가를 대표하는 요소들이 두드러진다. 특히 600쪽이 넘는 분량이 단 한 문장으로 구성돼 있어, 그의 극단적인 문체 실험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이 작품을 두고 "원자 입자들이 충돌하는 듯한 에너지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단 한 문장의 서사, 작가 특유의 묵시록적 비전이 언어의 한계를 시험한다"고 평했다.

소설의 무대는 독일 튀링겐의 가상마을 카나다. 작품은 이곳에 살아가는 인간 군상과 사건을 따라가며 눈에 보이지 않게 진행되는 재앙의 또다른 얼굴을 그려낸다. 제목의 07769는 카나의 우편번호다. 헤르쉬트는 독일어로 '통치와 지배'를 의미하지만, 주인공 헤르쉬트 플로리안의 삶은 이름의 의미와 정반대다. 그는 주체적인 선택을 하지 못한채 청소회사를 운영하는 보스에게 철저히 종속된 상태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헤르쉬트는 주변에서 '동네 바보'처럼 인식되지만, 순한 성품으로 사람들을 돕고 자신의 용돈을 나눠주는 인물이다. 그러나 어느날 물리학수업을 계기로 물질과 반물질의 비대칭 문제에 집착하게 되면서, 세계가 붕괴할 것이라는 우주론적 예측에 사로잡힌다. 그는 급기야 당시 독일 총리였던 메르켈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는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음악이 중요한 장치로 등장한다. 바흐의 음악은 묵시록적 공포와 대비되는 질서와 완결성의 상징으로 기능하며, 혼돈에 빠진 세계 속에서 예술의 힘을 부각한다. 화성학과 수학적 구조 위에 구축된 바흐의 음악은 무너져 가는 사회 질서와 대조되며 사회 구조에 대한 사유를 자극한다.

특히 소설의 배경인 튀링겐이 바흐의 출생지라는 점에서, 음악과 서사는 더욱 밀접하게 맞물린다. 헤르쉬트가 집착하는 물리학적 종말론과 바흐의 완결성은  뚜렷한 대비를 이루며 혼돈 속에서도 예술이 하나의 초월적 질서를 제공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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