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자 교재도, 시험 지원도 없다…시각장애인 회계사 '0명' 현실

기사등록 2025/12/31 09:00:00 최종수정 2025/12/31 09:12:24

현직 시각장애 회계사 '0명'…지난해 1차 시험 응시자 단 1명

시험 편의는 확대지·시간연장뿐…전맹 시각장애엔 '무용지물'

英선 2013년 전맹 공인회계사 탄생…제도지원으로 길 열어

[서울=뉴시스] 이종성 수습기자=선준영씨 사진. 2025.12.31. bsg05107@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이종성 수습 기자 = "시각장애인의 선택지에는 회계가 없어요. 당사자도, 학교도, 회계 법인도 마찬가지죠. 그 누구도 시각장애인이 회계사가 될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선준영(24)씨는 시각장애인이다. 2019년 전맹 시각장애인으로는 처음으로 경희대학교 회계세무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국내 1호 시각장애인 회계사'를 꿈꿨다. 그러나 그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능력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볼 수 있는 책이 없고, 시험을 치를 최소한의 환경조차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씨는 대학 시절에도 점자 전공 서적을 구하지 못해 D학점을 받은 경험이 있다. 그는 "회계를 공부할 수 있는 환경 자체가 없었다"고 말했다. 국내 회계 분야는 열악한 교육 인프라와 형식적인 시험 편의 제공 탓에 시각장애인에게는 사실상 불모지로 남아 있다.

실제로 현재 국내에서 활동 중인 시각장애인 회계사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 없다. 한국공인회계사회와 금융감독원 모두 시각장애인 회계사 현황을 별도로 파악하고 있지 않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공인회계사(CPA) 1차 시험에 응시한 시각장애인은 단 1명뿐이었다

◆CPA 점자 교재 '전무'…교재 1권당 제작만 2달 넘어

가장 큰 문제는 회계학을 공부할 수 있는 점자 교재의 부재다. 2024년 국립국어원이 발표한 '점자 사용 양상 실태 조사'에 따르면 시각장애인의 절반 이상이 학업을 위해 점자를 활용한다. 그러나 CPA 수험용 점자 교재는 시중에 단 한 권도 없다. 회계학은 표와 계산식, 그래프 등 시각 자료 비중이 높아 점역 난도가 높기 때문이다.

선씨 역시 1년 정도 시험을 준비했으나 공부보다 책을 만드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아야 했다. 점역사의 도움을 받아도 책 한 권을 점자로 만드는 데 최소 두 달이 걸렸다. 출판사에 PDF 파일을 요청해도 저작권 유출을 우려해 거절당하는 경우가 많아 직접 교재를 스캔해 파일로 만들고 다시 점자로 변환해야 했다.

비시각장애인의 CPA 평균 수험 기간이 약 3년 10개월이고 통상 20~30권 이상의 교재가 사용되는 점을 고려하면 권당 두 달이 걸리는 제작 과정은 시각장애인에게 시험 도전 자체를 가로막는 구조적 장벽이다.

선씨는 "1년 정도 회계사 시험을 준비했지만 공부는 거의 못 하고 책만 만들다가 중단했다"며 "복지관이나 점자도서관에 점역을 맡기려 해도 회계책은 자료 특성 때문에 대부분 거절당했다"고 말했다.

[서울=뉴시스] 선준영씨가 점역사의 도움을 받아 직접 제작한 회계사 수험 교재. (사진=선준영씨 제공) 2025.12.31.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저작권법은 복지관이나 점자도서관 등 대통령령으로 정한 시설이 시각장애인을 위한 대체 자료 제작을 목적으로 출판사에 디지털 파일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거부했을 때 강제하거나 제재할 수단은 사실상 없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김예지 의원실 관계자는 뉴시스와의 통화에서 "법적으로는 해당 시설이 요구하면 파일을 제공해야 하는 것이 맞다"면서도 "하지만 출판사가 저작권 유출이나 보안 우려를 이유로 거부할 경우, 이를 강제하거나 처벌할 조항이 현실적으로 없다"고 설명했다.

◆형식적 시험 지원도 '장벽''…"공정한 경쟁 불가"

자격시험 역시 시각장애인에게 높은 문턱으로 작용한다. 법조계가 스크린 리더와 점자 정보 단말기 사용을 허용하며 시각장애인 법조인을 배출한 것과 대조적이다. 금융감독원은 시험 시간 연장과 확대 문제지를 제공한다고 밝혔으나, 이는 저시력자를 위한 조치일 뿐 선 씨와 같은 전맹 시각장애인에게 확대 문제지는 무용지물이다.

금융위원회가 공고한 '2026년도 CPA 시험 시행계획'에는 "장애인 등이 편의를 제공받고자 하는 경우 응시원서 접수 기간 중 신청하면 심사 후 제공한다"는 문구만 게재돼 있다.

[서울=뉴시스] 2026년도 제61회 공인회계사 시험 시행계획 공고(위) 및 세무사회 자격시험 장애인 편의 제공 사항(아래) (자료=금융감독원 및 한국세무사회 제공) 2025.12.31. *재판매 및 DB 금지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올해 1차 시험에 시각장애인 응시자 1명이 있어 확대 문제지와 답안지, 시험 시간 연장을 제공했다"며 "국가공무원 시험 등을 참고해 그에 준하는 조치를 했다"고 밝혔다. 다만 스크린 리더나 점자정보단말기 사용과 관련해서는 "응시생이 요청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교육 현장과 당사자들은 이러한 지원이 형식적이며 시각장애인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전맹 시각장애인에게 확대 문제지는 무용지물이며 계산과 풀이에 필요한 보조공학기기 지원 없이는 공정한 경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안혁순 한빛맹학교 교사는 "시간 연장이나 확대기만으로는 공정한 경쟁이 불가능하다"며 "비시각장애인은 도형이나 그래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지만 시각장애인은 점자의 한계로 문제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훨씬 더 긴 시간이 걸린다. 수능처럼 시각장애인에게 적합한 문제를 같은 난도로 제작하는 방식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英선 전맹 시각장애인이 '회계 감사'… 국가가 끊은 구조적 차별

해외에서는 제도 차원에서 구조적 차별을 끊고 있다. 미국은 '미국 장애인법(ADA)'과 '재활법 제508조'를 통해 정부와 기업이 장애인의 직무 수행에 필요한 장비와 환경을 제공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미국공인회계사협회(AICPA)와 전미회계사위원회(NASBA)는 시각장애인 수험생에게 스크린 리더와 화면 확대 프로그램 사용을 공식 지원하며, 시험에 사용되는 모든 소프트웨어가 보조공학기기와 호환되도록 하고 있다.

[서울=뉴시스] = 머지사이드 경찰청 회계 감사관으로서 공로를 인정받아 MBE 훈장을 수여받은 시각장애인 사이마 아슈라프. (제공=영국 DPA) 2025.12.31.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영국에서는 전맹 시각장애인 사이마 아슈라프가 2013년 공인회계사 자격을 취득해 현재 경찰청 선임 감사관으로 활동 중이다. 그는 스크린 리더를 활용해 회계 데이터를 분석하며, 지난 6월에는 공로를 인정받아 대영제국 훈장(MBE)을 받았다.

반면 한국에서는 교재 제작부터 시험 편의 제공, 보조공학기기 사용까지 모든 부담이 개인에게 전가돼 있다. 국가 기관은 수요가 없다는 이유로 인프라 마련을 미루고, 그 결과 시각장애인은 회계사라는 진로를 선택조차 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선씨는 현재 회계사 도전을 잠정 중단했지만, 후배들을 위해 점자 회계 교재 제작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내가 꼭 회계사가 되지 않더라도, 언젠가 회계를 꿈꾸는 후배가 있다면 적어도 시험은 매끄럽게 볼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다"

안 교사는 "시각장애인이 회계사가 되려면 비시각장애인보다 10배의 노력이 필요하다"며 "법적·제도적 지원이 제공된다면 국내 1호 시각장애인 회계사도 충분히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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