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곽수영의 그림 앞에 서면
걷고 있지 않은데도,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발은 멈춰 있지만, 시선은 안쪽으로 밀려 들어간다.
Voyage Immobile.
작품 제목은 ‘부동의 여행’이지만
정확히 말하면, 움직이지 않는 여행이다.
캔버스 위에는 분명 풍경이 있다.
그러나 그 풍경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고딕 성당의 아치처럼 보이는 구조,
끝없이 반복되는 기둥과 통로,
그리고 그 끝에서 겨우 살아남은 듯한 빛.
그러나 이 빛은 ‘비추는 빛’이 아니다.
긁혀서 드러난 빛,
덮였다가 다시 나타난 기억의 잔상에 가깝다.
‘Voyage Immobile(부동의 여행)’ 연작은 이 감정 이후의 상태를 보여준다.
폭풍이 지나간 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요해진 순간.
그러나 그 고요는 결코 비어 있지 않다.
아치형 구조 속 깊은 공간은 시간이 멈춘 장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기억과 사유가 계속 왕복하는 내부 공간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뒤로 돌아가는 것도 아닌
그 자리에 머문 채 생각만 이동하는 상태다.
성당 내부에서 은은하게 퍼져 나오는 빛의 울림,
고요한 공간을 가로지르는 선의 떨림.
곽수영의 회화는 언제나
쌓였다가, 긁히고, 드러난다.
그는 색을 올리고 시간을 기다린 뒤,
다시 그것을 훼손한다.
이 반복 속에서 화면은 완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완성에 저항하는 상태로 남는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매끈하지 않다.
표면에는 수없이 긁힌 흔적이 남아 있고,
선들은 정돈되지 않은 채 서로를 밀치며 교차한다.
마치 감정이 지나간 자리처럼.
‘La Tempête(폭풍)’ 연작에서
자연은 더 이상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작가의 내면이 요동치던 한 시기의 상태이며,
감정이 자연이라는 언어로 번역된 결과다.
폭풍은 지나가지만,
그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다.
곽수영의 회화에서
빛은 희망도, 구원도 아니다.
그저 남아 있는 것이다.
어둠을 밀어내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겨우 버티는 빛.
그래서 그의 화면은 밝아지지 않는다.
대신 깊어진다.
이 깊이는 감정을 자극하지 않는다.
관람자를 설득하지도 않는다.
다만 묻는다.
“당신의 기억은 어디까지 긁혀 나갔는가.”
겹겹의 물감과 긁힌 흔적 끝에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밝힘도, 계시도 아니다.
촛불 하나.
그림은 결국 본다는 일이다.
어떤 그림은, 천천히 보지 않으면 끝내 열리지 않는다.
곽수영의 화면에서
이 불꽃은 길을 가리키지 않는다.
어둠을 몰아내지도 않는다.
그저 흔들리며,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사실만을
조용히 증명한다.
이제서야 우리는
그 빛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빛 앞에서
비로소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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