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주의는 사라지고 자아는 비대해졌다…'신에 관하여'

기사등록 2025/12/17 13:27:42

[서울=뉴시스] 최희정 기자 = "신은 죽지 않았다. 과거에 신은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냈는데, 신의 드러남을 마주할 인간이 죽었다." (본문 중)

신간 '신에 관하여'(부제: 시몬 베유와의 대화, 김영사)는 올해 '스페인의 노벨상' 아스투리아스 공주상을 수상한 재독 철학자 한병철이 펴낸 철학 에세이집이다.

저자는 20세기 최고의 천재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시몬 베유(1909-1943)의 통찰력 넘치는 사유의 세계로 안내한다.

시몬 베유는 프랑스의 철학자, 노동운동가, 레지스탕스 활동가, 신비주의 사상가다.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22세에 교수자격시험에 합격해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공장에서 일하며 노동운동을 했고,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부대에 합류하고 2차 세계대전 기간에 런던의 프랑스 망명정부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폐결핵 진단을 받고 영국 애슈퍼드의 요양원에서 요양하던 중 서른넷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불꽃 같은 삶을 살았던 시몬 베유의 사상은 동시대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줬고 "우리 시대의 유일한 위대한 정신"(알베르 카뮈), "금세기 최고의 영성작가"(앙드레 지드)와 같은 평가가 이어졌다.

시몬 베유에게 매료되고 '영혼의 우정'을 느끼게 된 한병철은 베유의 주요 텍스트를 오늘의 상황 속에서 다시 읽어낸다. 그리고 소비와 생산의 세계에서 상실한 초월성, 위로부터 오는 힘인 '신'에 대한 관심을 환기한다.

우리를 쉼 없는 생산과 소비, 정보와 소통에서 허우적거리도록 만드는 '성과 사회', '중독 사회'의 치유책을 제시하며, 무의미와 존재 결핍에서 벗어나 다른 현실을 꿈꾸게 한다.

"종교가 처한 위기의 구조적 원인으로 주의(注意)의 쇠퇴와 더불어 대폭 강화된 자아를 꼽을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주의는 오로지 자아 주위를 맴돈다. 우리는 충성스럽게 자아를 숭배하고 예배한다. 누구나 자기를 섬기는 사제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자기를 섬기는 사제란 자기를 부리는 사업가를 뜻한다. 누구나 자기를 생산하고 자기를 공연한다. 요란스러운 자아는 신을 우리에게서 멀리 떼어놓는다." (53~54쪽)

"디지털 과도(過度) 소통은 고요를 파괴한다. 정보는 그 자체로 소음이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을 정보로서 지각한다. 그리하여 정보 및 소통 쓰레기가 세상을 소음으로 뒤덮는다. 소음으로서의 정보는 주의를 깨부순다. 오직 관조적 주의만이 고요에 접근할 수 있다. 영혼을 공격하는 정보 및 소통 소음은 근대의 기계 소음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다. 정신이 전혀 다른 것을 만들어내거나 수용할 수 있으려면, 고요가 필요하다. 창조의 장소는 고요하다." (89쪽)

책에는 몇 개의 문장 만으로도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는 예리한 진단, 매력적인 격언이 주목을 끈다. 가령 그는 오늘날 종교가 처한 위기를, 신앙하는 내용의 타당성 상실 혹은 교회의 신뢰 상실 때문이라고만 보기는 어려우며, 오늘날 만연한 주의력의 상실, 디지털 세계에서 대폭 강화된 자아, 고요의 상실과 같은 것이 그 구조적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한병철은 1959년 서울 출생으로, 고려대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했고 독일 브라이스가우의 프라이부르크대와 뮌헨대에서 철학, 독일문학, 가톨릭 신학을 공부했다. 베를린예술대 철학·문화학 교수를 지냈다. 유럽과 한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피로사회'를 비롯해 '관조하는 삶', '정보의 지배', '사물의 소멸', '고통 없는 사회' 등 사회 비평서와 철학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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