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템페스트' 재해석한 '태풍'에서 프로스페라 역 맡아
원작 남성 역할 여성으로 바꿔…"과감한 시도, 내가 맡아 기뻐"
"연극은 순산하는 과정 같아…답 찾아가는 과정이 나를 지탱해"
"극 중 용서 받는 상대 인물들의 에너지로 충만해져…신비한 경험"
"관객들도 일상에서 어느 순간 '태풍' 떠오르며 위안 얻으셨으면"
[서울=뉴시스]김주희 기자 = "저는 원래 따뜻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런 제 마음에도 따뜻함이 왔으니 굉장히 감사한 작품이죠."
배우 예수정(70)은 연극 '태풍'과 함께 따뜻한 연말을 보내고 있다. 지난 4일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한 국립극단의 신작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희곡 '템페스트'를 바탕으로, 동생에게 권좌를 빼앗기고 쫓겨난 밀라노 공작이 복수 대신 용서와 화해를 택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예수정은 이 작품에서 밀라노 공작 프로스테라를 연기한다. 원작속 남성 인물인 프로스페로를 여성으로 바꾼 설정이다. 나폴리의 왕 알론조 역시 여성 '알론소'로 재해석됐다. 권력의 대립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용서라는 선택이 지닌 인간적 깊이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12일 만난 예수정은 '태풍'에 참여한 이유를 세가지로 정리했다.
"첫 번째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라는 점, 두 번째는 갓난아기 때부터 엄마(배우 정애란)와 함께 드나들던, 내가 사랑하는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한다는 점이에요. 세 번째는 남성 역할을 여성으로 바꾼 시도가 좋았어요."
그는 특히 세 번째 이유를 길게 설명했다.
"젊은 역할은 성전환을 많이 시도하지만, 나이가 있는 역할은 그렇지 않죠. 나이 든 여성 배우가 무대에 서는게 관객에게 호감형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과감하게 성별을 바꿨고, 그걸 제가 맡게 됐다는게 대단히 기뻤어요."
언젠가는 사무엘 베케트의 고전 '고도를 기다리며' 역시 여성배우가 연기하는 날이 오길 바란다고 했다.
"'고도를 기다리며'도 언젠가 한 번은 여성이 해야 하지 않겠어요? 여성끼리 말고, 여성과 남성이 같이 하면 더 재밌을 거 같아요. 요즘엔 남자 사람친구도 있잖아요. 남녀가 같이 하면서 '남사친'이 뭔지 보여줄 수도 있겠죠."
개막 전 공개된 포스터 속 예수정은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투박한 옷차림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무대 위의 그는 다르다. 분노와 번뇌를 지나, 용서를 택한 프로스페라의 내면이 차분하게 스민다. 평소 스피드를 즐겨 '카레이서'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는 그는 "내 원래 모습은 포스터에 훨씬 가깝다. 아주 거칠다"며 웃었다.
"맨 처음 바라본 '태풍'은 포스터 속의 모습과도 같았어요. 하인들을 부리며 편안히 살던 사람이 12년을 무인도에서 살아내며 거칠어진 거죠. 하지만 이 작품은 내면의 변화에 더 초점을 뒀어요. 훨씬 더 인간적이고, 아름답고, 온유하죠."
용서와 화해라는 말은 익숙하지만 막상 이를 마음먹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극 중 프로스페라는 동생의 배신으로 모든 것을 잃은 인물이다. 이 때문에 프로스페라의 선택이 공감을 얻게 하는 것이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예수정은 "프로스페라는 무인도에 오기 전부터 연금술에 빠져서 동생이 잘못하고 있을 때도 잡아주지 않고 나 몰라라 하다 당했기 때문에 '내 탓'도 있다는 걸 안다. 책을 많이 읽은 이성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극한의 상황에 가면서 이성을 잠시 잊어버린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깊게 뿌리내린 절벽을 흔들어, 소나무와 삼나무를 뿌리째 뽑았다. 내 명령으로 무덤에선 잠든 자들이 깨어나, 입을 벌리고, 내 마법은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는 대사를 짚었다.
"용서하려다가도 막상 눈앞에서 봤을 때는 '(저들이 잘못한 게 있으니) 죽어도 할 수 없지' 싶은 거죠. 지옥 문이 열린 거예요. 이 짧은 장면에 인간의 본성과 함께 후회하는 마음이 함께 드러난다고 봐요.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하고 용서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거죠."
프로스페라는 마법을 익혀 태풍을 일으키지만 결국 이를 이용해 용서를 한다.
프로스페라처럼 마법을 쓸 수 있다면 무엇을 하고 싶을까. 예수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 팔 대신 날개를 달고, 날아올라 보고 싶다. 중력에 묶인 이 지구를 한 번 보고 내려오면 어떨까"라고 했다.
"이렇게 끄집어 당기는 힘 때문에 애통하기도, 분하기도 하지 않나요? 중력의 힘을 거슬러 보고 싶어요"
요즘 그는 무대 위에서 매일 '달에 닿는 느낌'을 경험한다. '태풍'의 마지막 장면에서 배우들이 모두 퇴장하고, 조명 장치가 모두 내려온 뒤 이를 헤치며 다시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이다.
"(조명 장치가) 다 내려온 뒤 무대에 나설 때는 우주 탐사선에 탄 느낌이에요. 중력을 거스르진 못했지만, 그 때는 달에 첫 발을 디딘 것 같다. 전혀 다른 세상 같고, 너무 신비롭다.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로 너무 행복해요."
1979년 연극 '고독이란 이름의 여인'으로 데뷔한 데뷔 46년 차를 맞은 그는 여전히 연극, 영화, 드라마 등을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연극은 "뱃속에 아이를 갖고, 순산하는 과정"과 같은 특별한 매력이 있다고 소개했다.
"연극을 할 때는 가장 편안한 마음으로, 두 달에서 석 달 동안 한 주제에 대해 계속 생각해요. 아이를 품고 있을 때처럼 필요한 시간도 있고요. 그리고 무대에 서서 커튼콜을 할 때는 아이가 '응애'하고 태어나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회의가 생길 때도 있고, '수정아, 넌 아직도 그 꼴이냐'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럼에도 답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의 재미와 행복감이 (나를) 지탱해주는 게 아닐까 싶다"고 털어놓았다.
연륜 있는 배우에게도 여전히 연기는 쉽지 않다.
예수정은 "경력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가짜로 하면 안 된다'를 확실히 아는 것 하나 정도가 쓸모 있다"며 "모든 작품을 처음 받으면 늘 '신입생'이다. 늘 새롭다. 경력이 있다고 한 번 읽어보고 다 될까. 나는 안 되더라"고 했다.
경력에 기대지 않고, 늘 새로운 마음으로 작품에 임하는 그에게 이번 '태풍'도 남다른 의미를 가진다.
그는 "내가 맡은 역할이 변화하며 (상대를) 용서를 하는데, 용서 받는 인물들의 에너지가 돌아오는 게 있다. 그때 감사함으로 충만해지는 순간들이 있더라. 신비롭고 감사한 경험으로 남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난 원래 따뜻한 사람이 아닌데, 내 마음도 따뜻해진다"며 활짝 웃었다.
'태풍'과 함께한 관객들도 어느 날 문득, 이 따뜻함을 느끼길 바라는 마음이다.
"'태풍'을 보시고, 명동 거리도 걷고 맥주도 한잔 마시다가 어느 순간, 내일일지 내년일지 모르지만 극장에서 봤던 장면이 데자뷔처럼 떠오르며 위안이 되거나 답을 얻으셨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이 작품을 한 사람으로 굉장히 기쁘겠어요."
'태풍'은 28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관객과 만난다.
◎공감언론 뉴시스 juhee@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