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日강제노동 희생자 유골 귀향을 이끈 사람들…'긴 잠에서 깨다'

기사등록 2025/12/12 07:40:00

[서울=뉴시스] 최희정 기자 = 일제강점기, 죽어서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있다. 강제노동에 동원돼 타국에서 생을 마감한 희생자들이다.

신간 '긴 잠에서 깨다'(푸른숲)는 국가와 사회로부터 외면받아 영영 잊힐뻔했던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해 고국으로 모신 사람들, 그리고 그 중심에 있었던  고(故) 정병호 교수의 삶을 기록한 책이다.

정병호 교수는 1997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을 조직해 일본 홋카이도 이대에 묻힌 일제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발굴에 나섰다. 그는 2015년엔 한국 대표로 희생자 유골 115구의 '70년 만의 귀향'을 이끌었다.

정 교수를 기리기 위해 국내외 동료와 제자들이 힘을 합쳐 정 교수가 남긴 구술녹취록을 바탕으로 '긴 잠에서 깨다'를 세상에 내놓았다.
 
정 교수는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일리노이대 어배너-섐페인에서 문화인류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아동을 위한 '공동육아와공동체교육', 남북 어린이를 위한 '어린이어깨동무' 활동 등을 했다. 그는 인류학을 단순 학문이 아닌 현장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움직임으로 삼고 이를 실천하며 살았다.

1989년 일본의 어린이집을 연구하던 그는 우연한 계기로 도노히라 스님이 운영하는 어린이집에 방문했다. 일리노이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과 서울 달동네에 만들어놓은 해송유아원을 위해 자료를 수집하던 정 교수에게 도노히라가 운영하는 어린이집은 엄청난 자연환경을 갖춘 완벽한 연구 장소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움직인 현장은 따로 있었다. 당시 도노히라 스님은 홋카이도 선주민이라는 이유로 박해받은 아이누나 아시아-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희생자, 그리고 강제노동 희생자를 위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 도노히라 스님의 제안으로 동행한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이 묻혀 있다는 슈마리나이 현장은 묘지라고 할 수 없었다. 여기저기 움푹 꺼진 땅에 나무뿌리와 풀이 잔뜩 엉켜 있는 방치된 땅이었다. 슈마리나이 현장은 어린이집 연구 논문과 해송유아원뿐이던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긴 잠에서 깨다'의 신호탄을 쏜 울림이었다.

"여러분 모두 좋은 뜻으로 잘하고 계신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종교적으로도 의미 있는 일을 하셨지만, 이것은 역사적인 범죄 현장이자 그 범죄의 희생자들이 묻혀 있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증거로서 의미가 될 만큼은 기록을 남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문가가 올 때까지 기다려주십시오. 나도 유골 문제의 중요성은 잘 알고 있지만 지금은 논문 쓰는 게 급합니다. 빨리 논문을 쓰고 한국에서 교수가 되면 학생들과 다시 오겠습니다." 그 약속을 1989년 가을에 했고 약속을 지킨 것은 1997년 여름이었다. (49쪽)

이 책은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발굴에만 초점을 두고 있지 않다. 이 모든 과정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화합과 평화다. 정 교수는 슈마리나이 현장에서의 유골발굴을 시작으로 한국과 일본, 재일동포와 대만의 청년들까지 동아시아가 하나가 될 수 있는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주춧돌이 됐다. 이는 학계 사람과 시인, 지역 사회까지 참여해 힘을 불어넣은 단체로, 그가 꿈꿨던 '하나'가 되는 화합과 평화의 메시지 자체다.

이 책은 저자를 비롯해 그와 얽힌 수많은 사람의 작은 움직임으로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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