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美-유럽 갈라치는 ‘키신저식 외교’ 하지 않는 이유는?

기사등록 2025/12/04 10:41:52 최종수정 2025/12/04 11:20:24

트럼프의 유럽 안보 공약 축소로 유럽, 中에 도움 요청

中, 유럽 안보질서 주도로 많은 시장접근 등 대가 얻어낼 수도

“허약하고 의존적인 러와 관계, 극동 영토 회복 등 이득 더 많다 판단”

[베이징=AP/뉴시스] 시진핑(가운데) 중국 국가주석이 블라디미르 푸틴(왼쪽) 러시아 대통령,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함께 9월 3일 '중국 인민 항일 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전승절)' 80주년 기념 열병식이 열리는 베이징 톈안먼 광장으로 걸어오고 있다. 2025.12.04.

[서울=뉴시스]구자룡 기자 =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의 냉전 외교는 중국과 손을 잡고 소련을 고립 봉쇄하는 것이었다.

‘핑퐁 외교’에 이은 1979년 미-중 수교 이후 소련은 10여 년 만에 15개 연방국이 뿔뿔이 흩어지는 제국의 해체를 맞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에 복귀한 이후 유럽 방위에 대한 미국의 약속을 의문시하고 우크라이나 방어에도 거래적인 태도를 보였다.

포린폴리시(FP)는 2일 중국이 미국과 소원해지는 서유럽 국가의 희망대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에 영향을 미쳐 휴전을 중재하는 등의 역할에 나섰다면 중국은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미국과 유럽의 갈라치기에 성공했을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그럼에도 중국은 유럽과 손잡고 패권 경쟁국인 미국에 맞서기 보다 러시아를 지원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중국은 미-중 갈등속에 미-유럽 사이를 벌려놓을 수 있는 ‘키신저식 외교’를 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가브리엘리우스 란츠베르기스 리투아니아 전 외무장관이자 스탠포드대 프리먼 스포글리 국제연구소 연구원은 FP 기고에서 여기에 숨은 중국의 깊은 노림수를 소개했다.

◆ ‘무제한 협력’ 선언한 중-러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022년 2월 4일 베이징 동계 올림픽 개막 직전 회담에서 ‘무제한 협력’을 선언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특별군사작전’ 명목으로 침공하기 20일 전이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중국이 동계 올림픽(2022년 2월 4∼20일) 기간은 피해 달라는 부탁을 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왔다.

러시아는 2008년 8월 8일 베이징 하계 올림픽 개막일에는 남오세티야를 전격 침공해 잔치집에 재를 뿌린 적이 있다.

‘무제한 협력’ 선언의 효과였을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4년 가량을 맞은 현재에서 보면 중국의 러시아 지원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FP는 “금융 지원부터 러시아 무기 산업에 대한 핵심 기술 공급까지 양국의 ‘무한한 파트너십’은 우크라이나 전쟁은 물론 유럽 전체의 미래 안보에 매우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

란츠베르기스은 미국이 유럽 방위에 대한 공약을 축소하면 유럽연합(EU)에 온갖 선물을 쏟아부어 중국이 대서양 동맹에 마치 키신저처럼 행동함으로써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라고 연초에 주장했으나 실제로는 달랐다고 전했다.

2월 중국 외교관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유럽에 대한 적대감 고조와 안보 공약에 대한 공개적인 의문 제기가 나오자 뮌헨 안보회의 등에서 활발하게 움직였다.

◆ “유럽, 중국 지원에 큰 대가도 감수했을 것”

유럽은 중국에 러시아의 침공 종식을 위한 도움을 거듭했다. 트럼프가 유럽을 외면하는 가운데 중국은 이러한 호소에 응답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를 얻었다.

유럽은 중국의 지원에 큰 대가를 기꺼이 감수했을 것이라고 란츠베르기스는 전망했다.

중국의 희망 목록에는 인도-태평양 지역에 대한 불간섭 보장, 유럽시장 및 기술에 대한 더 큰 접근성 확보 등도 포함될 수 있다.

중국의 중재로 유럽의 안보보장국이 되는 것은 최근까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지정학적인 의미가 있는 중국에게 최고의 업적이었을 것이라고 란츠베르기스는 평가했다.

유럽은 중국의 희토류 수입 없이는 간신히 생존할 수 있을 뿐이며 유럽 일부 국가는 이미 중국 시장으로 향하는 등 의존도도 커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 중국의 러 전방위 지원

중국의 러시아 지원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러시아의 전쟁 수행을 위한 무기 제조 장비의 주요 공급처였다. 벨라루스에 최근 중국이 건설한 탄약 공장도 한 예다.

중국의 러시아산 석유 구매는 재정적 생명줄이다.

중국이 러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이용해 갈등을 억제했다면 유럽 안보에 큰 역할을 하고 유럽 국가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중국산 전기자동차나 5G 통신 장비와 같은 수입품에 대한 저항은 무너졌을 것이다.

스페인은 중국화된 유럽의 모습을 보여주는 초기 사례다. 스페인은 트럼프의 국방비 증액 압력을 거부하고 중국과 관계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중국은 더 많은 유럽 국가들이 스페인의 선례를 따라 중국의 요구에 응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 유럽에 당근 제공보다 러시아에 채찍 준 중국

란츠베르기스 전 장관은 “중국은 유럽에 당근을 내밀기보다 러시아에 채찍을 제공하는데 더욱 박차를 가했다”고 분석했다. 

분석가들은 러시아 군사 생산량의 80~90%가 중국산 장비나 부품을 사용하여 생산된다고 추정한다.

중국의 지원이 없으면 러시아가 전투를 지속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럴 경우 전투 초기처럼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하는 인적 공세 전술로 회귀해야 한다.

란츠베르기스는 “중국은 병들고 취약한 러시아에 모든 것을 걸기로 했다”며 “유럽의 침략과 삶의 혼란을 조장함으로서 중국이 유럽 대륙의 새로운 지정학적 중심이 될 수 있는 모든 시도를 명백히 포기했다”고 했다.

◆ 중국 지도자들의 노림수는…청나라 때 뺏긴 극동 영토 회복 요구할 수도 

중국 지도자들은 트럼프 행정부 하에서도 오랜 대서양 유대가 깨지기 어려울 것이라고 계산했을 수 있다.

궁지에 몰린 푸틴 대통령은 정권의 안정을 위협하지 않고서는 전쟁을 멈추거나 늦출 수 없다.

중국의 지원이 없으며 중산층에 세금을 부과하고 병력을 동원해야 하는 데 이는 더 큰 불만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패배에 대한 대중의 충격을 기억하는 푸틴은 오늘날까지도 그 사실을 한탄하고 있다.

중국은 대러 영향력을 활용해 경제의 수익성이 높은 부문에 접근하고자 할 수도 있다.

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궁극적으로 러시아의 가장 귀중한 자산인 천연자원을 표적으로 삼을 가능성이 높다.

란츠베르기스는 “중국인들은 역사를 기억한다”며 극동의 영토 회복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19세기 팽창하던 러시아는 청나라로부터 광대한 영토를 빼앗았다.

(러시아는 2차 아편전쟁 이후 휘청이던 청제국으로부터 2차례 조약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 등이 포함된 연해주 등을 차지했다. 다만 냉전 시기 양국은 영토 분쟁을 일단락지었다.) 

란츠베르기스는 “현 중국 지도부는 ‘역사적 불의’라고 부르는 것을 바로잡는 데 집착하고 있지만 지금까지는 북동부 국경 문제 해결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러시아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러시아에 외만주(극동 연해주 등 지칭) 반환을 요구하는 날이 예상보다 빨리 올 수 있다”고 전망했다.

◆ 러, 대중 의존도는 “실존적 수준”

러시아의 중국 의존도는 거의 실존적 수준이다. 중국의 지원이 없다면 푸틴 정권은 심각한 붕괴 위기에 처할 것이다.

이러한 일방적인 의존은 러시아를 사실상 중국의 속국으로 만들고 있다. 중세 시대 모스크바 대공국이 몽골에 예속되었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모스크바 대공국의 현대 후계자(러시아)가 중국에 의해 인도-태평양 지역 군사 작전에 병력을 제공하도록 강요받는다면 이 아이러니는 극에 달할 것이다.

란츠베르기스는 이런 상황을 종합하면 중국은 유럽과의 관계 개선보다 유럽에 맞서 러시아를 지원하는 것이 장기 전략에 훨씬 더 유리하다고 보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유럽의 일부 사람들이 순진하게 기대했던 것처럼 유럽에 평화를 가져오거나 우크라이나를 재건하는 데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중국은 종속적인 러시아와 함께 정치적, 경제적으로 통합된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고 란츠베르기스 전 장관은 분석했다.

◆ 푸틴도 중-러 밀착으로 이득

푸틴은 전쟁 이전 러시아의 권위주의 경제가 지속 가능하지 않음에도 이를 진지하게 개혁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체제를 정치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과거 제국의 영광을 되살리겠다는 야망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 계약을 러시아인들에게 제안했다.

러시아인들은 푸틴의 제국 재건 비전을 받아들였고 그 비용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 듯했다.

란츠베르기스는 "이제 푸틴의 국내적 정통성은 군사적 성공과 영토 확장에 달려 있고 이는 중국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며 중국이 러시아와 밀착으로 기운 배경을 설명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kjdragon@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