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뉴시스] 김진호 기자 = "석포제련소는 지난 수십 년간 대한민국 산업화의 초석이 돼 왔습니다. 아연 제련을 통해 철강, 조선, 자동차, 건설 등 국가 기간산업을 떠받쳤고,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여 국가경제에 기여했습니다. 또 수많은 일자리를 제공해 봉화, 태백 경제를 지탱해온 생명줄입니다."

25일 오후 경북 봉화군 석포면에는 주민 500여 명이 모여들었다. 평소 조용한 산골마을 광장이 순식간에 군중으로 채워졌다. 주민들의 얼굴에는 제련소와 지역, 가족들을 지키겠다는 절박함이 배어났다.

박재한 봉화태백석포생존권 사수를 위한 공동투쟁위원장(봉화청년회의소 회장)은 "정부는 환경 문제만을 앞세워 제련소를 이전 폐쇄하겠다는 무책임한 결정을 내리고 있다"면서 "이는 지역 경제를 붕괴시키고 수많은 근로자, 가족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무자비한 처사"라고 반발했다.

최근 정부와 정치권을 중심으로 석포제련소 이전 논의가 공식화되면서 주민들의 불안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경북도는 제련소 이전 TF를 구성한 데 이어 타당성 검토에 착수한 바 있다. '검토 단계'일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주민들의 의구심은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현장에 나온 주민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제도적 불신에 가득 찼다. 한 주민(50대)은 "우리는 늘 결정 과정에서 빠져 있었다. 제련소가 사라지면 이 마을이 존재할 이유가 없어진다. 그런데도 왜 대책 없이 이전부터 말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봉화군 평균 연령은 58.7세로 이미 고령화 지역이다. 제련소가 소재한 석포면은 51.7세로 상대적으로 젊다. 제련소가 제공하는 일자리 덕분에 젊은 부부들이 정착했고, 그 결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마을이 됐다. 주민들은 "이전 논의는 아이들이 있는 이 지역의 미래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날 총궐기대회에는 강원 태백 주민들도 다수 참석했다. 태백은 탄광 폐쇄 이후 급격히 쇠락한 도시다. 이들에겐 제련소가 마지막 남은 버팀목이다. 한 주민(70대·태백)은 "우리는 이미 한 번 도시가 무너지는 걸 경험했다. 제련소마저 빠져나간다면 이번에는 봉화와 태백이 동시에 쓰러질 것"이라며 이번 궐기대회가 단순한 제련소 이전 반대가 아닌 지역 생존권 수호의 장이라고 강조했다.

석포제련소는 봉화군 경제 전반을 떠받치는 역할을 해왔다. 2000년 230명이던 임직원은 2025년 660명으로 늘었다. 공사업체 인원 500여 명까지 포함하면 제련소 상주 인력은 1100여 명에 이른다. 이들 가족까지 포함하면 제련소에 생계가 걸린 인구는 수천 명이다. 직영과 협력업체 직원들에게 지급되는 비용만 연 1000억원에 달한다. 마을의 상권·교육·주거가 모두 이 구조에 맞춰 돌아간다.

석포초등학교 전교생은 90여 명이다. 봉화에서 두 번째로 학생 수가 많다. 불과 몇 년 전에는 교실을 증축해야 할 정도로 아이들이 늘었다. 만약 제련소가 사라진다면 젊은 세대가 빠져나가고, 결국 학교 역시 명맥을 잇기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지역 상권도 마찬가지다. 마트, 음식점, 학원, 병원 등 생활 인프라 대부분은 제련소와 그 가족을 주요 고객층으로 삼는다. 한 상인은 "매출의 절반 이상이 제련소 덕분인데, 이전이 현실화 되면 가게 문을 닫아야 한다"고 우려했다.

주거와 복지 환경도 제련소를 중심으로 확충됐다. 사원 아파트가 들어섰고, 주민생활체육센터와 복지관이 조성됐다. 축구장, 커뮤니티 센터 등은 마을을 단순한 산업현장이 아닌 생활 공동체로 변모시켰다. 주민들은 "제련소는 단순히 일터가 아니라 마을을 가능하게 한 뿌리"라고 말한다.

영향은 태백으로 확장된다. 제련소 직원 상당수가 태백에 거주하면서 소비와 교육 수요를 만들어냈다. 태백은 이미 인구 공동화와 경제 쇠퇴를 겪었지만 제련소 덕분에 최소한의 활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태백의 한 식당 주인(50대)은 "석포제련소는 이 도시의 숨통 같은 존재"라며 "이전이 현실화되면 두 번째 폐광을 맞는 것이나 다름 없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주민들이 두려워하는 건 도미노 붕괴이다. 공장이 사라지면 일자리가 끊기고, 젊은 층은 떠나며, 학교와 상권이 문을 닫고, 마을 자체가 해체된다. 이날 집회에서 반복된 말은 "이전은 곧 지방소멸"이었다.

석포제련소 이전에 대해 정부와 경북도는 "아직 확정된 것은 없다"고 선을 긋고 있다. 김성환 환경부 장관은 "기업과 지자체, 주민과 상의해 이전 가능성과 일자리 대책을 함께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경북도 역시 "용역은 종합적 검토일 뿐 이전을 전제한 것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주민들의 불안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이미 태백·삼척은 탄광 쇠퇴로, 군산은 조선·자동차 공장 철수로, 구미는 전자산업 이탈로 고통을 겪었다. 국내외 수많은 사례에서 산업 기반 상실은 곧바로 인구 유출과 지방소멸로 이어졌다. 주민들이 "이전 논의 자체가 지역을 버리겠다는 신호"라고 받아들이는 이유다.

집회에 참석한 한 주민(40대)은 "환경 문제가 중요하다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산업을 없애는 방식으로 해결한다면 남는 건 폐허뿐"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50대)은 "정책 결정에 주민을 배제하지 말고, 대책을 먼저 제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임광길 석포면현안대책위원장은 "제련소가 이전 폐쇄되면 일자리를 빼앗기고, 가정이 파괴되고, 지역경제 또한 무너지며, 석포는 사라질 것"이라며 "봉화·태백도 지방소멸 위기가 닥쳐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이 투쟁은 단순한 제련소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의 삶을 지키며,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지켜내는 싸움이다. 중앙정부와 경북도, 환경단체는 우리의 한맺힌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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