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1935년 야학 운영…일본 순사 속이며 비밀리 공부
당시 야학 교사들 항일 정신으로 무장…항일 투쟁 목적도
교재 읽고 붓으로 쓰며 한글 익혀…소녀회 기념비도 세워
14일 제주연구원의 전신인 제주발전연구원이 1996년 펴낸 '제주여성사Ⅱ'에 따르면 동복리 소녀회는 1929년 현재 제주시 구좌읍 동복리에 거주하는 15세 전후의 소녀들로 구성돼 약 10년간 야학에 참여했다.
현재 동복리 소녀회와 관련한 공식 자료는 제주여성사Ⅱ 외엔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 자료는 동복리 소녀회에서 회장 격 역할을 했던 고(故) 부두성(당시 77세)씨가 1994년 11월 증언한 내용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증언 당시 부씨는 소녀회가 1929년 결성된 것으로 기억했으나, 1927년 11월13일자 지면에 동복리 여자 친목회가 11월1일부터 소녀 야학을 개최했고, 3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는 내용의 동아일보 기사가 있다.
소녀회라는 명칭은 창설 당시 야학에 참여한 행원리 초등학교 교사가 정했다고 한다. 주변의 학교나 서당에 못 가는 소녀들이 야간에 교사 또는 회원들 집에서 수업이 열릴 때마다 5~6명이 모여 한글 공부를 했다.
야학에선 한글습자 교재를 사용했고, 일본 순사들이 검열을 오면 일본어를 배우는 것처럼 몰래 공부했다고 한다. 회원들은 교재를 읽고 난 뒤 백상지에 붓으로 필기하며 한글을 익혔다.
야학을 운영하는 동안 교사들이 중간 중간 바뀌며 최소 5명 이상이 참여했던 것으로 부씨는 기억했다. 당시 교사 중 일부는 일본을 오가며 항일 운동을 벌였던 인물들이며 이들이 항일투쟁을 전개할 목적으로 야학에 참여했다고 증언했다.
부씨는 자신이 결혼을 하고 교사들도 바뀌면서 야학 운영이 흐지부지되다 1935년께 해체된 것으로 기억했다.
◆해체 이후 마을에 헌금…기념비도 세워
소녀회 구성 초기에는 동네 마을 어른들이 십시일반 모은 기금을 통해 운영됐다. 이후 회원들도 집에서 좁쌀과 보리쌀 등을 가져와 판 뒤 기금에 보탰다. 또 소녀회에서 공동으로 마을 공터에 잡곡을 심어 수확한 뒤 돈을 마련하기도 했다.
1935년 소녀회가 해체되면서 모았던 기금으로 동네 향사(鄕祠)를 짓는 데 20원, 부두를 건설하는 데 20원을 냈다. 향사 앞마당에는 이런 내용을 담은 '소녀회 기념비'가 1936년 4월1일 세워졌다.
이후 기념비는 제주교육박물관이 1995년 개관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옮겨와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이 작업을 담당한 박물관 관계자가 기념비에 한 내용을 조사하기 위해 1994년 부씨와 만나 증언을 남기게 됐다.
소녀회는 최근 동복리에서 향토지 편찬 작업이 이뤄지면서 재조명되고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 한글을 배우고 지키는 야학 활동의 항일운동사적 가치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편찬에 참여하고 있는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원 특별연구원 강만익 박사는 "일제강점기 동복리를 지탱했던 마을 역사의 한 축인 소녀회 활동에 주목할 예정"이라며 "특히 항일 정신으로 무장한 교사들이 동복리 소녀들을 대상으로 비밀리에 실시했던 한글 교육의 항일운동사적 가치를 높게 평가해 마을 주민들의 자긍심을 높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소녀회가 받았던 한글 교육 방법, 야학 운영비 마련을 위한 농작물 파종 및 판매 활동, 소녀회 회원들이 십시일반 모은 성금을 마을 축항 공사라는 공동체 행사에 자발적으로 기탁한 공동체 정신을 향토지에 담을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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