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중박'새 나라 새 미술'展 1부 '백白, 조선의 꿈을 빚다'
분청사기, 백자, 도자 파편 등 총 509건 512점 선보여
조선전기 분청사기-백자 과정 국가·장인 '혁신' 뒷받침
공납체제 개혁…관청 이름 새기고 지리지 펴내 체계화
자기에 생산지·장인 이름도…견본 제공·인화기법 도입
[서울=뉴시스] 이수지 기자 = 새 나라 조선이 시작되면서, 유교의 새로운 사상을 바탕으로 새로운 정치·사회 체제가 자리 잡았다. 미술에도 새로운 변화가 보이는데, 그중 도자기는 고려시대 청자에서 조선 분청사기를 거쳐 백자로 이행하게 된다. 조선전기 백색의 미감이 뿌리 내리기까지 이뤄낸 혁신의 중심에는 '국가'와 '백성'이 있었다.
지난 10일부터 열리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용산 이전 개관 20주년 특별전 '새 나라 새 미술, 조선 전기 미술 대전'의 1부 '백白, 조선의 꿈을 빚다'는 나라와 백성이 함께 이뤄낸 혁신의 시작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도자기는 분청사기 303건 303점, 백자 168건 171점, 도자 파편 38건 38점 등 무려 총 509건 512점이다.
새 나라 조선은 왕을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정부의 모습을 구상, 국가 기반 제도 개혁에 착수했는데, 그 중에서도 재정·수취의 구조 개편에 주력했다.
조선을 세운 이들은 공물(貢物)제도를 개정했는데, 공물 중 도자기 납부 체계를 뜯어 고쳤다. 도 단위로 공물을 수취해 공납 자기에 관청의 명칭을 새겨 각 관청이 이를 직접 관리하도록 하는 한편, 자기에는 생산지와 생산자(장인)의 이름을 새기도록 했다. 자기 유출과 훼손을 막아 안정으로 세원 확보를 하려한 것이다.
공납체제를 갖추고 치밀하게 실행하려 한 국가의 지속적 시도와 그 안에서 자기를 만들어낸 장인들의 땀이 비로소 고려청자에서 완전히 벗어나 완성도를 갖춘 분청사기로의 이행을 촉발했다.
◆조선, 고려 공납 체제를 정비하다
"호조에서 또 아뢰기를, "장흥고의 공안부(貢案付) 사목기(砂木器)에 금후로는 '장흥고(長興庫)'라 3자를 새기고, 기타 각사(各司)에 납부하는 것도 또한 장흥고의 예에 의하여 각기 그 사호(司號)를 새겨서 제품을 만들어 상납하게 하고, 윗항의 표(標)가 있는 기명(器皿)을 사장(私藏)하다가 드러난 자는 관물(官物)을 훔친 죄를 받게 함으로써 큰 폐단을 끊게 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태종실록 권 33 중에서)
조선의 개정된 공납제도는 1차적으로 태종 13년인 1413년에 시행됐다. 1417년 호조 건의로 공납 자기에 관청 명칭을 새기도록 하며, 장흥고를 비롯한 각 관청이 자기를 직접 공납받고 관리하도록 했다.
공물 가운데 도자기가 있었고, 전국에서 생산해 중앙으로 납부했다. 고려시대 전라도 강진과 부안을 중심으로 청자를 생산하다 고려 말 내륙으로 흩어진 도자기 장인들이 공납 자기 생산자가 됐다.
조선 왕실은 14세기 말 왜구의 침략으로 인해 무너진 고려의 조운(漕運)제도를 을 조선 개국 초부터 재건하고자 했다. 1413년 전국적으로 시행한 공납제에도 폐단이 있었지만 제도 확립과 효율적 실행을 위한 노력은 여러 차례 이어졌다.
임진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새 나라 조선은 왕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중앙정부의 모습을 구상해 지방 사회에 중앙의 지배를 확대하고자 했다"며 "국초부터 고려의 무너진 체제를 재건하고자 국가 기반 제도의 개혁에 힘을 쏟았는데, 그중에서 재정·수취 구조 개편이 매우 주요했다"고 설명했다.
◆그릇에 관청 이름을 새기고, 지리지를 펴내다
원활한 공물 납부 제도 운영을 위해 물품 산지와 일치하는 공물. 군현 토지와 가구 수, 생산과 운송의 여건 등이 필요했다.
이번 전시에 나온 '세종실록 지리지'를 비롯해 '경상도지리지', '경상도속찬지리지' 등은 조선 전기 왕실이 이를 위해 편찬한 관찬(官撰) 지리지들이다.
특히 1424∼1432년 조사되고 1454년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전국 군현에서 도자기를 공납 내지 진상한 생산지를 자기소(磁器所)와 도기소(陶器所)로 나누고 상품·중품·하품으로 품등을 정했다.
이중 자기소가 139개소, 도기소가 185개소다. 상품 자기소는 경상도 상주 2곳, 고령 1곳, 경기도 광주 1곳 등 4곳이었다. 1417년 호조의 건의로 자기소와 도기소가 자기에 관청 명칭을 새기면서 군현 단위로 공물 종류와 수량이 정해졌다.
이번 전시에는 전라도에서 주로 생산된 내자시(內資寺)와 내섬시(內贍寺), 경상도에서 주로 생산된 인수부(仁壽府)와 장흥고(長興庫)의 관용자기들이 가득하다.
임 학예연구사는 "이로써 조선 중앙정부는 전국 도자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고, 중앙 관청에 공납할 각 지방 자기 물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며 "전국 자기소와 도기소를 중심으로 한 자기 공납체제는 1467년 무렵 경기도 광주에 왕실 관요(官窯)가 설치될 때까지 국가의 주요 세원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도자에 생산지와 생산자 이름을 새기게 하다
"공조에서 계하기를, "진상하는 그릇은 대개 마음을 써서 튼튼하게 제조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오래 가지 않아서 파손되니, 지금부터는 그릇 밑바닥에 만든 장인(匠人)의 이름을 써넣어서 후일의 참고로 삼고, 마음을 써서 만들지 않은 자에게는 그 그릇을 물어넣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권 11 중에서)
전라도 공납 자기는 서남해안의 조운을 이용해 해로로, 경상도의 공물은 조운선의 조난사고 등을 계기로 1406년 후 낙동강과 남한강 수운이 포함된 육로로 운송됐다. 특히 경상도 공물은 충청도 충주 경원창(慶源倉)에서 중앙에서 파견된 차사원(差使員)에게 직접 납부했다.
공납 자기에 새겨진 대다수 제작지가 경상도에 밀집되어 있고(도 4, 5) 전라도에도 일부 보이는데(도 6), 이는 공납 자기의 운송 방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1421년에는 공조의 건의로 조선 왕실은 그릇의 밑바닥에 장인 이름을 써넣게 했다. 이 무렵 관청명 앞에 지역 명칭이 들어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공납 자기 밑바닥에 사기장 이름을 넣은 파편들도 이번 전시에 나왔다. 이 파편들에는 광주 충효동 가마에서 출토된 김산(金山), 함김(咸金), 득부(得夫), 서암(徐岩), 이정(李井), 이하일(李下一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임 학예연구사는 "경상도 지역 공납 자기는 육로와 내륙 수운을 주로 이용해 운송했는데, 이때 발생하는 폐단으로 공납용 자기 제작과 공납의 실무 책임자, 곧 지역의 수령을 의미하는 생산지 명칭을 표기해 엄격히 관리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 과정은 공납 체제를 갖추고 치밀하게 실행하려 한 국가의 지속적 시도와 그 안에서 열심히 노력했을 장인의 노고를 짐작하게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 과정에서 분청사기 품질도 말기 고려청자에서 완전히 벗어나 치밀해지고 완성도를 갖췄다"고 덧붙였다.
◆견본과 인화(印花) 기법으로 전성기를 맞은 분청사기
"이제 동지(冬至)에 각도에서 바치는 철갑(鐵甲)은 아직도 가죽을 사용하여 짜고 꿰는 것은 실로 온당치 못하다. 이제부터 뒤로는 방물(方物)도 또한 견본(見樣)에 따라서 만들어 바치도록 하라"(태종실록 권 28 중에서)
중앙정부 수취체제 제도적 장치가 갖춰지자 전국 생산지 장인들의 생산 기술 발전이 필요했다.
인화(印花)는 기존에 손으로 무늬를 새기던 것을 무늬 도장을 사용해 그릇 표면에 새기고 그 속에 백토를 메우는 기법이다. 이 기법은 본질적으로는 상감 기법과 유사하나 도장의 존재로 기술 숙련도에 따른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어느 정도 품질의 균등화와 규격화를 보장할 수 있었다.
임 학예연구사는 "1417년경 고려 상감청자를 계승한 분청사기의 장식기법이 상감에서 인화로 변화하는 것은 공납체제와 관련해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이라며 "이와 관련해 1414년 각 도의 공물을 견양(見樣)에 따라 만들라는 태종의 명이 있어 주목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공납품에 견본이 존재했던 것으로 미루어 자기를 견양에 따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으로 인화 기법이 사용됐을 개연성이 높다"며 "인화 기법 등장은 공납 자기 품질을 균등하게 끌어올리고 양식을 규격화할 뿐 아니라 경제성을 극대화하려는 선택과 집중의 결과"라고 했다.
견본에 따라, 공납 자기에 새겨진 관청의 명칭과 생산지 명칭은 안바닥, 굽바닥, 외측면 등에 위치하게 되며 나머지 부분은 인화 문양으로 가득 채웠다. 그렇게 등장한 인화분청은 1430년대에 이르면 그릇 전체를 하얗게 채우며 전성기를 맞는다.
임 학예연구사는 "조선 초 기면(器面)을 꽉 채운 문양으로 절정을 맞은 인화분청사기 명품에서 국가 체제의 정비와 제작 기술의 과감한 전환이 단기간에 이룬 일차적인 성과를 엿볼 수 있다"며 "나라와 장인의 노력은 이제 눈처럼 하얀 백자의 생산을 향해 방향을 바꾸어 계속되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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