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 당했던 어머니, 손톱 다 빠져"
"다정하던 아버지, 폭도 소리 들어"
[제주=뉴시스] 오영재 기자 = 70여년 전 국가폭력에 의해 억울하게 생을 달리한 제주4·3 희생자들에게 무죄가 내려졌다.
제주지법 형사4부(부장판사 방선옥)는 29일 오후 검찰 '제주4·3사건 권고 직권재심 합동수행단'이 청구한 군사재판 직권재심(54·55차 병합)을 열고 희생자 60명에게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제주4·3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컸던 비극적인 사건"이라며 "중산간 지역을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하겠다는 '포고령' 발표 후 중산간 거주민들이 누명을 쓰고 처벌 받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피고인들에게 어떤 사실로 재판을 받고 있는지 조차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형무소에 가서야 형량을 알려주는 경우도 많았다"며 "유족들은 부모, 자식, 형제를 잃고도 수 십년동안 입 밖에 꺼내지 못한 채 희생자들을 가슴에 묻고 통한의 세월을 보냈다"고 덧붙였다.
희생자 측 변호인은 "이 사건 피고인들이 범죄를 저지른 사실이 없다"며 "전부 무죄를 선고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희생자 60명의 억울한 수형생활을 소개했다.
희생자 고 문광호는 당시 스무살 청년으로 밭에서 농사를 하고 있었는데 토벌대에 연행됐다. 이후 내란죄로 7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이후 행방불명 됐다.
희생자 고 부연희는 16살 당시 서귀포시 동홍리에서 농사를 짓다가 토벌대에 끌려갔고, 내란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인천형무소에서 수형 생활 중 1947년 7월11일 형무소 폭발사고로 숨졌다.
희생자 고 박자근은 28살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경찰 시험에 합격, 임용을 기다리던 중 끌려간 뒤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 이후 현재까지 행방불명됐다.
이날 법정에서는 희생자의 유족들이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사연도 털어놨다.
희생자 고 강상호·윤세선의 아들 강모씨는 "어업에 종사하던 부모님이 어느날 고기를 많이 잡았다. 그래서 동네사람들과 돼지 한 마리도 잡고 해서 함께 나눠먹었는데, 나중에 (토벌대가)폭도들한테 음식을 가져갔다고 하면서 두 분다 잡아갔다"고 말했다.
이어 "형무소에 갔다온 어머니가 50대부터 아프기 시작해 손발이 부었다. 그때 어머니로부터 고문을 많이 당했다고 들었다"며 "대나무를 손톱 사이로 끼워서 55세 정도에는 손톱이 다 빠져 없었다. 거꾸로 매달아서 고춧물을 코에 넣었다고 했다. 60대때는 걷지도 못했다. 그렇게 2002년도에 돌아가셨다"고 전했다.
희생자 고 홍성태의 자녀 홍모씨는 "저희 아버지는 결혼 생활 2년 정도 됐을 때 순경들이 드나들어 잡아갔다고 들었다"며 "어머니는 청각과 언어장애가 있었다. 가끔씩 아버지 얘기를 하셨는데, 다정하고 온화하고 가정에 착실한 분이었다고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말했다.
이어 "어머니는 동네사람들로부터 '저 집이 폭도를 해서 남편이 잡혀갔다' 소리를 들으면 속상해 하셨다. 그렇게 외롭고 쓸쓸하게 돌아가셨다"며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4·3에 대해 알고는 있지만 어떻게 잡혀갔는지, 억울한 사정들을 알리가 있겠나 싶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당시 기록을 토대로 공소사실을 특정했고 유무죄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됐다"며 "범죄의 증명이 없는 때에 속하므로 모두 무죄를 선고한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본인들의 삶이 위로 받기를 바란다"고 소회를 밝혔다.
앞서 제주지법 형사4부는 이날 오전 검찰 직권재심 합동수행단이 청구한 제15·16차 일반재판 직권재심 희생자 30명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한 바 있다.
한편 제주4·3 당시 약 30만명이 거주하던 제주에서 10분의 1인 2만5000~3만여명이 아무런 이유 없이 군경에 끌려가 불법 재판에 회부됐다. 이후 전국 각지 형무소에서 총살 또는 행방불명된 것으로 추정됐다. 일부 살아 돌아온 희생자들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예비검속에 의해 또다시 총살 등에 처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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