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왕궁터' 김해 봉황동 유적서 5세기 토목공사 흔적

기사등록 2024/10/22 10:49:30
[김해=뉴시스]가야시대 왕궁 '김해 봉황동 유적 전경, 대규모 토목공사 확인. 2024.10.22. (사진=김해시 제공). photo@newsis.com

[김해=뉴시스] 김상우 기자 = 가야시대 왕궁터로 알려진 '김해 봉황동 유적'에서 대규모 토목공사 흔적이 확인됐다.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소장 오춘영)는 사적 김해 봉황동 유적 발굴조사에서 5세기대에 대지 확장을 위한 금관가야의 대규모 토목공사 흔적을 확인하였다고 22일 밝혔다.

김해 봉황동 유적은 금관가야의 왕궁 또는 왕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봉황대 구릉을 중심으로 그 주변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가 여러 차례 이루어졌다.

그간의 조사를 통해 항구의 창고터, 야철터, 건물터, 조개무지, 환호, 토성, 지석묘 등 청동기시대부터 금관가야에 이르는 유적이 확인된 바 있다.

김해 봉황동 유적은 1963년 ‘회현리 패총’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된 뒤, 1990년대에 진행된 봉황대 구릉 일대의 발굴성과를 바탕으로 2001년 두 유적이 한데 묶여 ‘김해 봉황동 유적’으로 확대 지정됐다.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는 ‘가야왕궁터’로 알려진 봉황대 구릉 동편의 경사면과 평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대규모의 패각 성토층이 확인되어 그 성격 규명을 위한 세부조사를 진행해 왔다.

발굴조사 결과 봉황대 구릉 북동편의 저지대를 다량의 조개껍질을 섞어서 경사지게 켜켜이 다져 쌓아 대지를 조성 및 확장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이 구조물은 가야 당시의 토목기술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이렇게 조개껍질을 쌓아 성토한 토목기술은 지반 강화를 위한 것이며, 대규모 토목공사를 가능케 하였다. 이 패각성토층의 최대 깊이는 4m이고, 길이는 주변의 봉황토성의 성벽까지 이어질 것을 고려하면 100m가 넘는다.

성토 방법은 주로 넓은 대지를 조성할 때 이용되는 것으로 경주 황룡사터와 부여 금강사터 등 삼국시대 절터에서 단편적으로 확인된 바 있다.

봉황동 유적의 성토층은 이들 유적보다 조성 시기가 앞서고 조개껍질을 섞어 사용한 점에서 차이가 있고, 기존에는 탐색 트렌치(Trench, 길쭉하게 판 홈)를 활용해 확인한 토층의 단면만으로 경사 성토 사실을 제한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가 실시한 이번 조사에서는 밑지름 6~8m 내외, 높이 1m 내외의 둔덕을 쌓고, 이를 중심으로 한 여러 개의 동심원(중심이 같은 둘 이상의 원) 모양의 성토가 이뤄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평면 구조가 새롭게 밝혀진 것에 의미가 있다.
 
과거 봉황대 구릉 주변의 도시개발 과정에서 일부 확인됐던 봉황토성의 토축 성벽 조사결과와 이번 조사결과 등을 종합해 보면, 5세기대에 봉황대 구릉 전체를 둘러싸는 둘레 1.5km 정도의 토축 성벽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대지 조성 및 확장이 함께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대형주거지는 4세기대에 조성된 것으로 지난 2017년 일부 공개된 바 있으며, 그 이후로 추가 조사와 연구를 거쳐 내부의 아궁이 시설과 주거지 벽체의 세부 구조를 새로 발굴했다.

출토 유물은 당시 왕성 내의 생활과 의례, 음식 문화, 생산 활동 등을 엿볼 수 있는 자료들로, 각종 생활 토기를 비롯해 사슴·고래·상어 등 각종 동물뼈, 복골·모형토기·토우 등 의례행위 관련 유물, 동물뼈로 만든 화살촉·바늘·칼 손잡이 등 생활 공구로 사용된 골각기 유물, 철광석·송풍관 등 야철 작업과 관련된 유물 등이 공개됐다.

김해시는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와 협력하여 봉황동 유적에 대한 지속적인 발굴조사와 자연과학적인 분석 연구 등을 통해 가야 왕성의 실체를 밝혀 나간다.
[김해=뉴시스]가야시대 왕궁 '김해 봉황동 유적 토층, 대규모 토목공사 확인. 2024.10.22. (사진=김해시 제공). photo@newsis.com

[김해=뉴시스]가야시대 왕궁 '김해 봉황동 유적 대지조성 바닥 평면모양, 대규모 토목공사 확인. 2024.10.22. (사진=김해시 제공). photo@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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