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웅·문정희 100분 밀회 아슬아슬…연극 '랑데부'[이예슬의 쇼믈리에]

기사등록 2024/08/31 09:00:00 최종수정 2024/09/14 20:25:56
[서울=뉴시스] 연극 '랑데부' 공연 모습. (사진=옐로밤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재판매 및 DB 금지

매주 토요일 오전 연극과 뮤지컬 리뷰와 함께 공연과 어울리는 주류를 소개하는 [이예술의 스테이지]를 연재한다.

[서울=뉴시스] 이예슬 기자 = "온 힘을 다해 전력으로 달렸다. 노력하면 가까워 질 수 있을 것이다." (지희) "죽도록 노력해 본 사람은 안다. 때로는 노력해도 안되는 게 있다는 걸." (태섭)

연극 '랑데부'는 프랑스어 '랑데부(Rendez-vous)'의 중의적인 뜻을 모두 보여준다. 첫째, 특정한 시각과 장소를 정해 만나는 남녀 간의 밀회. 둘째, 인공위성이나 우주선이 우주공간에서 만나는 일이다.

로켓 개발자 태섭은 매주 수요일 저녁이면 어김 없이 영춘관에서 짜장면을 먹는다. 심각한 수준의 강박증을 갖고 있는 그는 저녁 메뉴에 있어서도 변수를 용납 못하는 사람이다. 몇 달 동안 출장을 다녀왔더니 단골 중국집의 음식 맛이 변해 마뜩잖다.

엄마의 장례식 이후 도망치듯 영춘관을 떠난 지희는 아버지가 타계하자 다시 영춘관으로 돌아왔다. 유년시절 자신을 가장 괴롭게 했던 장소지만, 자신이 아버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단골손님 태섭에게 아버지의 짜장면 레시피를 전수 받을 셈이다.

랑데부는 땅에 발을 딛지 못하고 우주를 떠돌 듯 살아온 태섭과 지희가 만나 서로의 아픈 과거를 살풀이 하듯 풀어내며 자신도 모르게 사랑에 빠지는 내용의 연극이다.

태섭의 강박증은 가족을 잃은 사고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 스스로 만든 법칙에 자신을 가둔다. 지희는 그런 태섭을 해방시켜 주고 싶다. 타인과의 접촉을 두려워하는 태섭을 위해 지희는 즉흥 춤을 제안한다. 처음에는 일정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다가 서로에 대한 마음이 서서히 열리면서 둘은 손을, 몸을 맞댄다. 우주를 유영하던 두 우주선이 마침내 도킹하듯.

[서울=뉴시스] 연극 '랑데부' 공연 모습. (사진=옐로밤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재판매 및 DB 금지
당연하게도 수십 년의 상처가 쉽게 치유되지는 않는다. 가까워 졌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한참이나 먼, 중력을 거스르기는 힘들어 보이는 둘의 관계를 관객들은 애달파 한다.

1시간 30분 가량의 연극에서 등장인물은 오로지 태섭과 지희 뿐이다. 한 번 무대 위에 등장하면 옷 한 번 갈아입을 새 없이 둘이 오롯이 극을 끌고 나가야 한다. 배우들의 연기력과 관객의 몰입에 공연의 성패가 달린 쉽지 않은 연극이다.

영화 ‘신세계’ 등에서 조폭, 건달류를 주로 연기해 왔던 박성웅의 연기 변신을 볼 수 있다. 평소 보여주던 강한 캐릭터와는 달리, 트라우마로 소극적이고 방어적으로 살아가는 태섭을 이질감 없이 연기했다.

경험담을 토대로 원안자로 참여한 문정희는 가족사로 아파하면서도 이를 스스로 극복해 내려는 주체적인 인물상을 잘 표현해 냈다. 최원영과 박효주가 또 다른 태섭과 지희를 연기한다.

직렬 방식의 런웨이 무대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패션쇼처럼 무대 양쪽을 관객이 둘러싼 모습이다. 배우들이 무대에 걸터앉아 연기를 하면 앞 자리 관객과의 거리가 채 50㎝도 되지 않는다.

무대 위에는 2개의 트레드밀이 설치돼 있다. 트레드밀의 작동이 가깝고 멀어지는 등장인물의 거리를 보여준다. 태섭과 지희는 빠른 시간 안에 가까워지는 듯 하다가도 멀어진다. 서로를 향해 죽을 힘을 다해 달려가지만 반대 방향으로 작동하는 트레드밀 때문에 닿지 못한다. 마치 중력을 거스를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듯.

연극은 남녀 간의 사랑을 그리고 있지만 트라우마로 고통을 겪은 인간들의 연대라고 봐도 무방하다. 사실 극의 서사를 요약하자면 굳이 많은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단순한데, 이 점이 단점으로 작용하기 보다는 보는 이에게 보편성을 호소한다.

극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터져 나오는 관객들의 훌쩍임은 누구나 하나쯤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를 마음 속에 품고 살아가기 때문이리라. 관객의 인생에서 서로 멀어지는 트레드밀에 서 있는 존재는 비단 연인 뿐 아니라 가족일 수도, 친구일 수도, 간절하지만 이루지 못한 꿈일 수도, 잃어버린 기회일 수도 있다. 공연은 서울 마곡 LG아트센터에서 9월 21일까지 열린다.

[서울=뉴시스] 연극 '랑데부' 공연 모습. (사진=옐로밤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 ★공연 페어링 : 이과두주(二鍋頭, 얼궈터우)
'랑데부'를 보고 나오면 짜장면 한 그릇을 탐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 질 것이다. 여기에 독주 한 잔을 곁들이면 기름진 면발을 빨아들인 입이 개운하게 씻겨진다.

곡물을 주원료로 하는 증류주 바이주(白酒)는 향에 따라 청향형, 농향형, 장향형 등으로 나눈다. 서민들의 술로 인식되는 이과두주는 청향형에 속한다. 소주나 보드카처럼 알콜향이 진하다는 특징이 있다. 농향형은 꽃 향기나 과실향이 풍부한데, 흔히 연태고량주로 불리는 '연태구냥'이 농향형이다.

서로를 사랑한다 해도 태섭과 지희의 삶은 녹록지 않을 것이다. 현실은 늘 그렇듯 디즈니 애니메이션처럼 '해필리 에버 애프터(happily ever after,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가 아니니까 말이다. 상처 받은 이들이 서로를 보듬고 살아가는 과정은 파인애플 향이 폴폴 나는 연태구냥보다는 거칠고 투박한 이과두주에 가까워 보인다.


◎공감언론 뉴시스 ashley85@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