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뉴시스] 이한빛 미술칼럼니스트 =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를 꼽으라고 하면 에드워드 호퍼의 이름은 무조건 상위권에 꼽힌다. 현대 도시인들의 우울함과 공허함, 그 멜랑콜리를 신파적이지 않게, 심지어 담담하게 잘 담아내는 작가로 유명하다. 그의 이름은 몰라도 한 번쯤은 보았을 작품 ‘Nighthawks’(밤을 지새우는 사람들)가 바로 이 미술관에 있다. 뉴욕의 MoMA도, 메트로폴리탄도 아니다. 내륙 중심의 호수 도시, 시카고미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이다.
◆3점의 명작, 전 세계 미술 애호가들을 불러들이다
시카고미술관 주요 소장품은 호퍼의 ‘Nighthawks’(밤을 지새우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르주 쇠라의 ‘A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그랑자트섬의 일요일 오후), 그랜트 우드의 ‘American Gothic’(어메리칸 고딕)도 있다.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 급은 아니더라도 미술애호가라면 한 번쯤은 직접 만나고 싶은 작품들이다.
이외에도 ‘이 작품도 시카고에 있었어?’싶은 작품들로는 고흐의 ‘침실’, 르누아르의 ‘테라스에 앉은 두 자매’, 구스타브 칼레보트의 ‘파리 거리’가 있다. 모두 시카고미술관이 자랑하는 컬렉션이다. 2009년엔 근대 이후 작품만을 선보이는 ‘모던 윙’(신관)이 개관하면서 선보이는 폭이 커진 것도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현재 미술관의 전체 소장품은 약 30만점에 이른다.
이처럼 ‘줄을 서서’ 보는 작품들은 어떻게 시카고미술관에 자리잡게 됐을까?
미술관 초창기 주요 기부자로는 프레드릭 클레이 바틀렛(Frederick Clay Bartlett, 1873~1953)이 꼽힌다. 화가이자 컬렉터였던 그는 ‘시카고 예술 클럽’의 창립멤버로 시카고 지역미술에 대한 관심도 컸던 패트론이었다. 쇠라의 ‘그랑자트섬의 일요일 오후’, 반 고흐의 ‘침실’ 등이 그가 미술관에 기부한 대표작이다. 뿐만 아니라 세잔, 고갱, 로트렉과 같은 후기 인상파 작품은 물론 피카소와 앙리 루소와 같은 현대거장들의 작품도 바틀렛 컬렉션으로 시카고미술관의 품에 들어오게 됐다.
또 다른 주요 기부자는 애니 스완 코번(Annie Swan Coburn, 1856–1932)이 있다. 클로드 모네, 폴 세잔 등의 작품을 포함한 인상주의 및 후기 인상주의 그림 100여점을 미술관에 기증했다. 르누아르 작품중에서도 수작으로 꼽히는 ‘(테라스에 앉은) 두 자매’, 모네의 ‘건초더미 (여름의 끝)’이 그의 컬렉션이다. 이외에도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사진 컬렉션 등이 주요한 컬렉션의 뼈대를 만들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가장 유명한 에드워드 호퍼의 ‘Nighthawks’(밤을 지새우는 사람들)는 기부가 아닌 구매작이다. 1942년 호퍼가 작품을 완성하고 불과 몇 달 만에 미술관으로 오게 된 것. ‘미국 미술의 친구들(The Friends of American Art Collection)’이라는 후원회에서 자금을 마련해 미술관이 구매할 수 있었다. 선견지명으로 사들인 ‘원석’이 이제는 전 세계 수 백 만명을 불러들이는 ‘보석’이 됐다.
1만 점에 달하는 컬렉션을 담아내기 위한 미술관 확장 프로젝트로 유명 건축가 렌조 피아노가 디자인했다. 사진제공=시카고미술관]
이곳은 왜 ‘기관’인가, 미술관이 아니라 한국말로는 쉽게 ‘시카고미술관’이라고 부르지만 정확한 명칭은 시카고 미술 기관 (Art Institute of Chicago)다.
왜 ‘미술관’(museum)이 아니라 ‘기관’(Institute)일까? 시카고미술관은 1879년 그 탄생을 아카데미로 출발했다. 35명의 예술가 모임이었던 ‘시카고 디자인 아카데미’(Chicago Academy of Design)가 그 시초다. 이후 재정문제로 운영이 어려워지자 ‘공공에 미술품을 전시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추가 펀딩을 받으며 ‘시카고 순수미술 아카데미’(Chicago Academy of Fine Arts)로 1882년 이름을 바꾸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미국 최고 명문 예술대학으로 꼽히는 시카고 예술대학(School of the Art Institute of Chicago∙SAIC)이 미술관과 함께 ‘기관’을 구성하고 있다.
작품을 컬렉션도 중요하나, 그 기본은 교육이다. 그래서 일까. SAIC 출신 중엔 세계적 스타 작가들이 많다. 미국 모더니즘의 어머니로 꼽히는 조지아 오키프를 비롯 그랜트 우드, 신디 셔먼, 제프 쿤스가 모두 이 학교 출신이다. 선배들이 컬렉션 한 명작 위에서 새로운 거장들이 탄생하고, 이들이 세계 미술계 지형도를 새롭게 그리고 있는 셈이다.
◆‘지친이여, 쉬어가라’ 정원이 말을 건다
시카고미술관은 미시간호수를 바라보는 밀레니엄공원 부지 안에 자리하고 있다. 시카고 관광을 온다면 누구나 들르는 관광지의 가장 중심인데, 360도로 도시의 전경을 담아내는 아니시 카푸어의 ‘클라우드 빈’과 거대한 전광판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하우메 플렌자의 ‘크라운 분수’(Crown Fountain)를 지나면 바로 미술관이다.
미술관이 이곳에 오게 된 것은 1871년 시카고 대 화재 때문이다. 웅장한 규모임에도 대칭적이고, 고전적 디테일로 마감한 보자르 스타일의 이 건물은 1893년 시카고 세계 박람회용으로 지어졌다가, 이후엔 미술관으로 쓰고 있다. 입구 계단에 놓인 두 마리의 사자가 트레이드마크다.
메인 건물 뒷편엔 현대미술을 위한 ‘모던 윙’이 있다. 2009년 건축가 렌조 피아노의 설계로 완성된 직선 기둥과 곡선 천장의 조화가 아름다운 빌딩이다. 유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내부에는 자연광이 가득하다. 모던 윙에는 외부로 향하는 하늘 산책로도 있어 미술관과 밀레니얼 파크를 연결한다. 지역 커뮤니티와 미술관을 잇고,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고 확장하는 모양새다. 하루에 다 돌기도 버거울 정도이나 (미술관 전체 규모는 1만 제곱피트, 약 2만8000평. 전시장 규모는 28만 제곱피트, 약 7800평), 작품을 보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돌아다니게 된다.
역시나 미술관 곳곳엔 규모가 작은 정원들이 자리하고 있다. 건물 중정과 앞쪽에 북쪽, 남쪽 정원이 그것이다. 신관의 옥상은 아예 밀레니얼 파크로 이어지며 미술관을 확장한다. 시카고미술관의 정원은 ‘쉼’을 이야기한다. 미술관 정원 단골 작가인 칼더, 엘스워스 캘리 같은 작가들의 작품이 놓였지만, 직접 들어가서 돌아다니기 전에는 작품이 있는지 알기 어렵다. 작품은 숨고 초목은 존재감을 뽐낸다. 야외 전시장이 아니라 말 그대로 정원이다.
덕분에 관객들은 주변에 앉아 조용한 시간을 보낸다. 엄마 손에 이끌려 미술관에 따라온 아이는 낮은 분수에서 물장난을 치고, 단 시간에 ‘미술품 과식’을 한 관객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보며 감상을 되새김한다. 중정을 제외한 북쪽과 남쪽 정원은 미술관 영업시간엔 외부에도 개방한다. 밀레니엄공원만을 찾은 이들도, 이곳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다. 군더더기 없이 ‘쉬라’고 말하 곳. ‘아, 참 좋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