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신안→목포→여수…호남 기독교 성지 가보니[이수지의 종교in]

기사등록 2024/04/27 07:07:00 최종수정 2024/04/27 12:29:46

한교총 '2024 한국기독교 근대문화유산 탐방' 행사

[영광=뉴시스] 야월교회 기독교인 순교기념관 (사진=한국교회총연합 제공) 2024.04.26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이수지 기자 = "순교는 죽음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입니다."

전라남도 영광에 있는 야월교회 옆 기독교인순교기념관 입구. 이 글귀가 관람객 발길을 붙잡는다.

6·25전쟁 때 전라남도 영광에서만 기독교인 194명이 북한 인민군과 공산주의자들에게 살해 당했다. 이중 영광 염산교회에서 77명, 야월교회에서 64명이 희생됐다.

한국교회총연합이 22~24일 진행한 '2024 한국기독교 근대문화유산 탐방'행사에 다녀왔다. 전남 영광, 신안, 목포, 여수 등 전남 기독교 최대 순교발생지, 전남 최초 설립 문화재교회 등 기독교 순교 성지들을 따라가는 여정이다.

이번 탐방에서 해설을 맡은 허은철 총신대 역사교육학과 교수는 "수탈도 많았던 굴곡진 역사 현장 호남의 기독교는 순교 이미지도 있지만 그 순교가 일어난 사건들이 용서로 끝났고 그 용서가 화해로 이어져 기독교 복음화율이 상당히 높은 곳"이라고 소개했다.
[영광=뉴시스] 염산교회 순교기념관 유뮬들  (사진=한국교회총연합 제공) 2024.04.26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전남 기독교 최대 순교발생지 염산교회와 야월교회
"공산주의자들이 그를 잡으러 집으로 갔을 때 나오라고 소리 치자 그는 '기도하고 나갈 테니 기다려달라'고 부탁하고 잠시 기도를 마친 후 그들에게 붙잡혀 돌을 매달고 바닷물에 수장됐다."

당시 35세였던 염산교회 성도 고몽룡 씨의 증언처럼 염산교회 순교기념관에는 순교한 교인들 사진과 명단, 교인들을 수장시키는 북한 인민군들의 모습이 담긴 기록화들이 가득했다.

북한 인민군이 교인들을 바닷가에 빠뜨려 죽일 때 교인들에게 매달았던 돌덩이와 인민군이 사용했던 죽창도 전시되어 있다.
[영광=뉴시스] 염산교회 순교기념관 유물들을 설명하는 최성남 담임목사(오른쪽)와 이철 한국교회총연합 공동대표회장 (사진=한국교회총연합 제공) 2024.04.26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야월교회에 조성된 기독교인순교기념관에도 염산교회와 야월교회 교인들의 순교 이야기가 담긴 기록화, 호남 기독교 역사 관련 자료, 1900년대 초기 성경부터 1950년대 성경까지 보관되어 있다.

이 때 9살이었던 최종한 야월교회 장로는 기념관 자료들을 설명하며 "이웃들이 새끼줄에 묶여 끌려가는데 무서워서 잠도 못 잤다"며 "전쟁이 끝나고 이제는 피해자 후손들이 가해자 후손들을 전도해 함께 교회를 다니고 있다"고 증언했다.

허 교수는 "당시 종교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사람이 너무 참혹하게 순교를 당했지만 자신들을 죽인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고 용서하면서 그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최후를 맞았다"며 "기독교 정신으로 서로를 품어주고 화해하며 마을 공동체를 만들어 갔다는 측면으로 이 지역을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목포=뉴시스] 양동교회 설명하는 강귀원 양동교회 역사위원장 (사진=한국교회총연합 제공) 2024.04.26.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전남 최초 문화유산 목포 양동교회
양동교회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유진벨이 목포에 최초로 설립한 교회다. 1897년 선교사들과 신도들이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린 것이 시초가 되어, 교인들의 노력으로 건립됐다.

양동교회는 목포 내 3·1운동인 4·8 만세운동을 목포시에서 일으켜 학교와 함께 목포 주민들의 일제에 대한 독립 의지를 드러내게 했다.

양동교회 박연세 목사는 신사참배와 총독부 전쟁협력 강요에 저항하다가 1942년 11월 불경죄와 보안법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개월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 중 1943년 옥중에서 고문으로 순교했다.

지난 2004년 국가등록문화유산로 지정된 이 교회는 교인들이 유달산에서 직접 날라 온 석재를 주재료로 축조했다. 특이하게 왼쪽 출입문 위쪽에 태극무늬가 새겨져 있다.

강귀원 양동교회 역사위원장은 "이 태극 문양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여기에 등나무가 아치처럼 태극 문양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라며 "일본 사람들이 못 봤는데 일본 사람들이 봤으면 이대로 놔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목포=뉴시스] 목포 양동교회 (사진=한국교회총연합 제공) 2024.04.26.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가운데 새겨진 태극무늬 주변에 한자로 '대한융희4년'이 새겨져 있다. 융희4년은 1910년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에 강제 병합된 해다.

이 글이 한문으로 새겨진 왼쪽 문은 남성 교인들이, 한글로 새겨진 오른쪽 문은 여성 교인들이 출입했다. 당시 예배실 가운데 휘장을 쳐서 남녀 신도실을 나눴다. 보존 수리되는 과정에서 휘장을 달았던 고리들은 유실됐다.

허 교수는 "양동교회 경우는 목포에서 제일 먼저 세워져 기독교 센터 역할을 해 역사적 가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천막을 달았던 고리들이 그대로 남아 있지 않아 아쉽다"며 잘 보존되지 못한 호남 기독교 문화유산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한일 갈등 넘어 교류한 현장 목포 공생원
[목포=뉴시스] 목포 공생원 기념 (사진=한구교회총연합 제공) 2024.04.26.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일제강점기 1925년 '거지대장'으로 불렸던 윤치호 전도사가 고아 7명과 생활하던 것이 공생원의 시작이다.

1938년 음악교사였던 일본인 윤학자(다우치 치즈코·1912~1968)는 이곳에서 봉사하다 윤 전도사와 결혼했다. 해방을 맞은 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고아들을 돌보는 데 헌신했다.

이연 공생복지재단 상임부회장은 윤치호·윤학자 결혼에 대해 "윤학자는 일본 관료 외동딸이어서 식민지 거지대장 청년과 결혼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기독교 집안인 다우치 가문 출신 윤학자의 어머니는 "결혼은 나라와 나라가 하는 게 아닌 사람과 사람이 하는 것"이라며 "하늘나라에서는 일본인도 조선인도 구별 없이 모두 형제자매"라고 조선 거지대장 청년과 딸 결혼을 허락한 일화가 전해진다.

1951년 전쟁으로 부족한 식량을 구하러 광주로 갔던 윤 전도사는 행방불명됐으나 윤학자는 1968년 작고할 때까지 고아 3000여명을 보살폈다.

1961년 윤학자가 일본을 방문하자 일본 국영방송 NHK는 윤학자가 공생원에서 한 헌신을 일본인들에게 알렸다. 그 자리에서 윤학자는 고향 일본 고치현에서 "일본인들이 큰 상처를 받은 한국 사람들에게 신뢰받을 수 있는 일을 실천해야 한다"며 일본인들에게 식민 지배를 반성하는 차원에서라도 공생원을 도와줄 것을 호소했다

공생원에는 윤치호·윤학자를 기리는 기념관, 어머니의 탑, 목포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사랑의 가족 기념비가 있다.
[여수=뉴시스] 손양원 목사 유적공원 내 손양원 목사상 (사진=한국교회총연합 제공) 2024.04.26.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두 아들 죽인 원수까지 품은 손양원 목사 유적공원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1948년 10월27일 손양원 목사가 두 아들 장례식에서 고백한 '하나님께 감사드릴 아홉 가지 감사기도' 중 일부다.

'사랑의 원자탄'으로 불렸던 손 목사는 평양신학교 졸업 후 여수 애양원 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해 나병 환자들을 위해 헌신했다.

일제 신사참배에 반대해 광주형무소에 수감됐던 그는 광주 형무소, 경성 형무소, 청주 형무소로 옮겨지며 6년간 수감 생활을 했다. 1945년 해방이 돼서야 애양원교회로 돌아왔다.

1948년 여순 사건 중 공산주의자 학생 안재선이 손 목사 아들 손동인과 손동신을 죽였다. 손 목사는 안재선을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아 '사랑의 원자탄'이라 불리게 됐다. 손양원 목사 유적공원에는 이를 상징하는 '화해와 용서'상이 있다.

전쟁이 일어나자 나병 환자들을 피난선으로 대피시키고, 자신은 스스로 움직이기 불편한 나병 환자들과 애양원에 남았다. 1950년 9월 북한 인민군의 애양원 습격 때 손 목사는 순교했다.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에는 두 아들이 순교하자 손 목사가 감사헌금을 낸 봉투, 손 목사 장례식에서 상주를 맡은 양아들 안재선 사진 등 손 목사 관련 자료와 유품을 볼 수 있다.
[여수=뉴시스] 손양원 목사 유적공원에서 손양원 목사의 삶을 설명하는 송영오 애양원교회 장로(왼쪽)와 이철 한국교회총연합 공동대표회장  (사진=한국교회총연합 제공) 2024.04.26.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송영오 애양원교회 장로는 "각박하고 분열된 세상에 손 목사님 사랑의 메시지가 전해졌으면 좋겠다"며 "서로 화합하고 사랑으로 용서하는 마음이 손 목사님을 통해 이 사회에 널리 퍼졌으면 해서 이 기념관이 세워졌다"고 말했다.

탐방을 함께한 이철 한교총 공동대표회장도 "이 지역에 이러한 순교 사건이 일어났지만 서로 알지 못한 갈등이 증폭돼 생긴 뼈저린 아픔"이라며 "뼈저린 아픔을 겪었지만 서로 용서하고 감싸 안고 이해 못한 갈등으로 생긴 아픔 치유에 신앙적 정신이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공감언론 뉴시스 suejeeq@newsis.com